무령왕(武寜王, 斯麻, 夫餘隆, 462~523, 재위 501~523):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25대 왕. <삼국사기>는 그가 ‘동성왕의 둘째 아들(二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분히 ‘법적’인 ‘입적(入籍)’관계를 일컬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곤지(昆支)의 도왜(渡倭) 상황과 함께 각라도(各羅島, 가카라시마)에서의 출생과 귀국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무령왕릉 지석에서 밝혀진 무령왕의 출생 연도와 시기가 일치하여 더 정확한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인지 또는 개로왕의 아들인지, 그리고 동성왕의 배다른 형(異母兄)인지 동생인지에 대해 8세기 <일본서기> 편찬자들조차도 헷갈려하며 모순되는 판단을 하고 있다. 한편 <역주 일본서기>(2013)의 역주에서는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무령왕의 용모와 성격에 대해 <삼국사기>는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0세 즈음에서야 즉위하는데 그 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왕릉 지석은 물론 어느 사서에도 기록이 없다.
백가(伯加, 苩加: ? ~ 501): 5세기 후반 백제의 위사좌평, 가림성주. 중요 인물이라고 생각됨에도 상세한 기록이 없고 ‘반역’ 상황과 12세기 <삼국사기> 저자이며 ‘묘청의 난’ 진압 공신인 김부식의 ‘극악한 악인’이라는 평가만 남아있다.
501년의 반도: 반란 직전의 상황
二十三年 春正月 王都老嫗 化狐而去 二虎鬪於南山 捕之不得 三月 降霜害麥 夏五月 不雨至秋 七月 設柵於炭峴 以備新羅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苩加鎭之
23년(서기 501) 봄 정월, 왕도(王都)에서 노파가 여우로 변하여 사라졌다.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웠는데 잡지 못하였다.
3월, 서리가 내려 보리를 해쳤다.
여름, 5월부터 가을까지 비가 내리지 않았다.
7월, 탄현(炭峴)에 목책을 세워 신라의 침입에 대비하였다.
8월,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3년(501) 조
동성왕의 폭군화(化)를 기록해나가던 <삼국사기> 동성왕 조는 501년 1월(음력) 기록에서 ‘왕도에서 노파가 여우로 변하여 사라지고’, ‘남산에서 호랑이 두 마리가 싸우는’ 이적(異蹟)을 묘사하고 있는데 ‘흑룡이 나타나는’ 기록처럼 어떤 정치적 상황을 표현했을 가능성이 커 보인다. 특히 ‘호랑이 두 마리’의 싸움은 두 세력의 충돌로 해석할 수 있으며, 필자는 위사좌평 백가를 위시한 ‘분권파’ 와 해성(解成: 가상 인물) 일파가 주도하는 ‘중앙집권파’의 대립이 표면 위로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던 것으로 설정할 생각이다.
3월과 5월, 서리로 인한 흉년과 계속되는 가뭄은 후에 무령왕대 기록에서도 이어지는 이상 기후인데 이런 장기적인 기후 변화는 정치적 변동을 가져오기에 충분한 환경이 된다. 7월에는 국방을 위한 조치가 취해지지만 고구려가 아니라 신라에 대비하고 있다. 신라와의 혼인 동맹에 어떤 문제가 생긴 것은 아닌지 생각되고, 1월 ‘노파가 여우가 되어 사라진’ 사건과 연결해볼 수 있을지 추리해본다. 특히 500년 신라왕으로 즉위한 지증 마립간은 재위 기간 내내 국호를 신라(新羅)로 확정하고, 행정구역과 법제를 정비하며 우산국(于山國: 울릉도)을 정복하는 등 고구려는 물론 ‘삼한 체제’로부터 벗어나는 ‘독립’을 추진해나가는데 백제로서는 당연히 경계할 만한 상황이다.
501년 8월, 드디어 가림성(加林城, 지금의 부여 부근) 축조와 위사좌평 백가의 부임 기록이 나타난다. 498년 7월에 사정성(沙井城) 축조의 기록이 있는데 좌평보다 네 단계나 아래인 한솔(扞率) 벼슬을 가진 이가 부임하고 있다. 즉 아무리 가림성이 요충지에 있었다손 치더라도, 15년이나 위사좌평으로 있었던 인물을 일개 성주로 임명했다는 것은 명백히 ‘좌천성 인사’임을 뜻한다. 또 이런 상황은 백가가 정치적으로 다른 세력에게 패배했다는 점을 말해준다.
동성왕 암살 사건
冬十月 王獵於泗沘東原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苩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3년(501) 조
是歲。百濟末多王無道。暴虐百姓。國人遂除而立嶋王。是爲武寧王。
이 해에 백제의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국인(國人)이 드디어 제거하고 도왕(嶋王: 시마키시)을 세웠다. 이를 무령왕(武寜王)이라고 한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무열) 4년(501) 조 (번역 <역주 일본서기>)
<삼국사기>와 <일본서기>는 동성왕의 죽음과 무령왕의 등극에 대해 같은 기록을 남기고 있지만 그 내용은 사뭇 다르다. <삼국사기>는 동성왕의 좌천성 인사에 불만을 품은 백가가 수하를 시켜 왕을 죽이는 ‘개인 책임’의 사건을 그리고 있으나 <일본서기>는 폭군이 된 동성왕을 ‘국인’이 명분을 가지고 죽인 정변(政變)으로 묘사하고 있다. ‘국인’은 <삼국사기> 등의 용례로 볼 때 ‘지배층’을 뜻한다고 한다(<역주 일본서기> 2013). 필자는 두 기록의 내용을 미루어 해석하여 이 글 끝의 ‘스토리 설정’에서 서술할 것이다.
‘백가의 난’ 기록과 의문점
春正月 佐平苩加 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 해명(解明)을 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임금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 금강)에 던졌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즉위 (502) 조
동성왕의 붕어(崩御)가 501년 12월이니 무령왕의 즉위와 백가의 가림성 농성은 502년 1월로 보는 것이 맞을 것이다. 왕이 ‘토벌’을 명한 해명(解明) 역시 그 직위가 한솔에 불과하다. 좌평이니 달솔이니 하는 고위 신료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단 말인지. 혹 이들 고위 신료들이 동성왕 시해의 진정한 배후이자 ‘역적’은 아니었는지가 필자의 스토리 설정에 깔린 주요한 의심이다.
* 스토리 설정: ‘백가의 난’ 전개와 무령왕의 행적, 신소도국(臣蘇塗國)의 해체
동성왕 시해 사건에서 핵심은 백가가 누군가를 ‘시켜’ 왕을 칼로 찔렀다는 것인데, 백가를 ‘살인교사범’으로 지목하기에 매우 알맞은 상황이다. 그러나 필자의 설정은 그 ‘누군가’는 백가의 명을 받지 않았고 오히려 고위 신료 다수가 포함된 해성 일파의 꼬드김을 받았다는 것이다.
‘누군가’로 설정되는 인물은 협승(協承)이라는 가상인물로 신소도국에서 백가와 같이 자란 심복이다. 성정이 고지식하고 다혈질이기까지 해서 ‘언젠가는 사고 칠’ 위험성은 있지만 백가에게 충성하는 인물이다. 그는 동성왕의 폭군 행각과 백가의 좌천에 대해 가장 분노하는 인물로 해성 일파의 부추김까지 받고 백가에게 반란을 건의하지만 백가는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하지만 백가는 동성왕 시해라는 협승의 독자 행동을 적극적으로 막지는 못하게 되니 ‘미필적 고의’ 쯤 된다고 하겠다.
해성 일파는 동성왕이 폭군화하여 민심까지 잃자 자신들에게 ‘효용성’이 다함을 알고 (물론 남의 손으로) 제거를 획책한다. 이 세력은 병관좌평 연돌(燕突)을 ‘바지사장’으로 삼고 있는데 별다른 직위가 없는 귀족 해성(가상인물)이 핵심적인 ‘비선실세’로 주도하고 있다. 해성은 477~478년 곤지와 문주왕을 암살하고 반란을 일으킨 해구(解仇)의 조카로, 한솔 해명은 해구의 손자로 설정된다. 다만 해명은 해구의 난 시기의 해례곤(解禮昆)처럼 해씨 가문의 청년이면서도 왕실에 충성하여 해성의 눈 밖에 나 있다.
동성왕은 협승의 칼에 찔린 후 곧바로 죽지는 않았다. 한 달여의 투병 후 붕어하기 직전 후사가 없는 동성왕은 드디어 사마(斯麻)를 후계자로 지목한다. 해성 일파는 자신들이 제일 경계하던 왕위 계승 후보인 사마를 옹립하는 것에 갑론을박을 벌이지만 다른 마땅한 후보를 찾지 못해 마침내 사마가 있는 해남 지역 소국으로 사절단을 보낸다.
사마는 498년 가을 홀로 도왜(渡倭)하여 사아군(斯我君)을 옹립하려고 하다가 왜왕 무열의 쿠데타로 실패하고 사아군과 함께 도망쳐 자신이 둘째 사위로 있으며 가족들이 기다리는 해남 지역 소국으로 다시 돌아온다(‘폭군의 시대 <1>, <2>’ 포스팅 참조). 이 소국의 신지(臣智)였던 부여숭은 왜왕 무열의 신료가 되었고 부여숭의 첫째 딸 영원(影媛)의 남편이었던 벽중왕 찬수류(辟中王 贊首流)는 무열에게 죽었으며(‘폭군의 시대 <1>, <2>’ 포스팅 참조), 사마를 뒤따라 돌아온 영원도 오월 지역으로 떠난 상태에서 사마는 드디어 소국의 신지가 되어 통치한다. 또한 권력의 공백 상태가 된 벽중과 아착(왜왕 무열의 옛 영지) 지역 소국에도 찬수류의 아들 마나군(麻那君)과 자신의 이복형 사아군을 각각 신지로 보내 통치하게 한다.
사마는 동성왕의 복속과 납세 요구를 받아들여 지키면서도 해남 지역 소국에서 선정(善政)을 베푸니 영산강 유역 신미제국(新彌諸國) 일대에 그 이름이 높아진다. 501년 12월 동성왕의 붕어 직후 해성 일파는 사마에 대해 호의적인 민심을 부담스러워하면서도, 예전 문주왕과 마찬가지로 ‘물렁한’ 캐릭터가 되어 자신들이 ‘컨트롤’하기에는 알맞다고 생각하고 백제대왕 즉위를 위한 사절단을 보낸다. 물론 즉위 이후 언제든지 ‘수가 틀리면’ 제거할 준비도 완료한 상태이다.
사마는 사람 좋고 줏대 없는 모습을 보이며 사절단을 융숭히 대접할 뿐만 아니라 대왕 등극에 대해 의례적인 사양도 없이 넙죽 승낙하니 해성 일파의 경계심은 더욱 풀리게 되고, 사마는 해남 지역 소국에서 곧바로 즉위식을 거행한다. 그런데 대왕에 즉위한 사마는 별안간 첫 칙명으로 오월(吳越) 지역에 밀서 두 통을 보내고, 수도 웅진성에 도착하자마자 소규모 군사를 이끌고 말을 달려 우두성에서 합류한 한솔 해명과 함께 사뭇 달라진 표정과 모습으로 가림성 앞에 나타난다.
한편 앞서 501년 11월, 동성왕을 찌른 협승이 백가에게 피 묻은 칼을 들고 와 고하자 백가는 칼을 빼앗아 협승을 베려 하지만 협승의 항변에 차마 베지 못한다. 이 때 백가의 고향이자 샤만 소국인 신소도국에는 엄청난 흉조로 예언되었던 현상이 일어나고, 백가의 지기(知己)인 여천군은 이를 신소도국의 마지막을 고하는 하늘의 뜻으로 해석하여 자신은 천군의 지위에서 물러나 평범한 무녀가 되고 백성들은 흩어지게 하니 신소도국은 멸망한다. 하지만 협승을 포함한 대부분의 신소도국 백성들은 역적으로 지목된 백가가 있는 가림성으로 향하여 농성에 함께 하고, 해성 일파는 웅진성에 아직 도착하지 않은 무령왕의 칙명도 없이 수천의 군사를 움직여 가림성을 공격하는데...
이후의 사건 전개는 오월 지역의 사건들과 함께 몇 번의 반전(反轉)을 포함한 극의 결말로 향하는 내용이므로 작품에서 보이게 될 것이다. ‘역사가 스포’이지만 결말의 몇몇 내용은 기록과 다르게 되며, 기록이 왜 달라졌는지에 대한 에피소드도 포함한다. 다음 포스팅은 오월 지역의 내전 전개와 열도의 정치변동에 대한 내용으로 에필로그를 제외하면 필자의 사극 줄거리와 관련한 마지막 열전 포스팅이다.
부여 가림성(성흥산성)의 잔존 성벽 (사진 중앙 윗부분, 2012.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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