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개로왕과 곤지 <2> - ‘요서백제’와 ‘월주백제’

이름없는 꿈 2014. 2. 14. 02:04

 

개로왕 (蓋鹵王, ? ~ 475, 왕위 455~475): 백제 제21대(<삼국사기> 기준) 왕. 비유왕(毗有王)
                                        의 장자.

 

곤지 (昆支, ? ~ 477): 개로왕의 동생 또는 아들, 백제 좌현왕(左賢王)이자 말년의 내신좌평. 
                     왜국 웅략왕(<일본서기>의 웅략천황)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백제의 흉노식 후왕(候王)제도
<삼국사기>에 기록되지 않은 개로왕의 행적이 나타나는 곳이 <송서>(宋書: 중세 고려시대의 중원 국가 송나라가 아닌 동진(東晉)을 이은 남조 국가 중 하나인 송(420~479)의 역사를 기록함)이다. 그런데 이 <송서>의 백제전(百濟傳) 첫머리는 재야 사학자들을 흥분시키고 주류 사학자들이 아리송해 하는 다음과 같은 구절이다.

 

백제국은 본래 고려(고구려)와 함께 요동의 동쪽 천여 리에 있었다. 그 뒤 고려는 요동(遼東: 搖動이라고 기록되어 있다)을 경략하여 차지했고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략하여 다스렸는데 이를 진평군 진평현(晉平郡 晉平縣)이라고 불렀다.

 

‘요동’과 ‘요서’는 시대에 따라 달리 비정되기도 하는데 대체로 현재의 요하(遼河) 또는 난하(灤河)를 기준으로 동과 서를 나누어 지칭하는 지역 명칭이다. 현재의 국사교과서들은 이 기록에 근거하여 한성에 있는 백제가 해양을 통한 경제활동 등의 측면에서 요서에 ‘진출’한 것처럼 기술하고 있다.

 

한편 <송서>에서 개로왕은 457년 송에 사신을 보내 유력 대신 11명의 관작 수여를 승인받는데, 11명 중 3명을 빼놓고는 모두 왕족인 여(부여)씨이다. 이들의 관작 이름들 중에서 백제사는 물론 한국사에서 이전과 이후에도 찾아볼 수 없이 ‘갑툭튀’하는 관작이 보이는데 제일 고위직인 듯한 두 명에게 수여된 것이다.

 

... 행관군장군 우현왕 여기를 관군장군으로 삼고, 행정로장군 좌현왕 여곤과...

 

‘행’(行)이라는 것은 ‘...장관 서리’와 같은 임시직을 뜻하는 말이므로 부여기를 정식 관군장군으로, 부여곤을 정식 정로장군으로 삼겠다는 말이다. 그런데 부여기를 ‘우현왕’, 부여곤을 ‘좌현왕’으로 지칭하고 있다. 우현왕(右賢王)과 좌현왕(左賢王)은 흉노 제국과 그 갈래 유목국가들의 직제로 후기 제정 로마의 부황제(副皇帝)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볼 수 있는데 갑자기 나타나고 있다. 좌현왕 부여곤은 대체로 우리의 관심사 곤지(昆支)와 동일인물로 추정되고 있고, 우현왕 부여기(紀)는 유일한 기록으로 더 이상 나타나지 않는다. 우현왕, 좌현왕의 직제는 백제 스스로 그들의 북방 계통 기원을 강조하는 경우로서 주목될 만하다. 또 백제왕의 입장에서 남쪽을 바라볼 때 동쪽은 좌측, 서쪽은 우측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에 후에 왜국을 관장하게 되는 곤지가 좌현왕을 맡는 것은 타당하다고 볼 수 있고, 부여기는 아마도 서쪽의 중국 방면을 담당하는 (송에 보내는 국서에서도 맨 앞에 표기) 제후였을 가능성이 있다.

 

‘요서백제’-모용선비(慕容鮮卑)와 백제
중국에 있을 ‘백제의 요서 진출’을 확증할 만한 고고학적 증거물은 확인되거나 증빙되기 어려운데 무엇보다 현재 자국 영토 내의 모든 유물과 유적을 중국사의 범주에 포함시키는 중국 정부의 치밀한 작업과 이에 따른 접근의 어려움 때문이다. 그러나 기록들에서 보이는 정황적인 증거들은 충분하다고는 할 수 없어도 유력하게 추정할 정도는 된다고 본다.

 

그런데 ‘요서백제’를 물을 때 우선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는 표현이 있는데 ‘백제의 요서 진출’이 아니라 ‘복귀’라는 표현이 더 어울릴듯하다는 것이다. 온조와 비류 설화에서 백제는 고구려와 그 이전 북만주에 위치한 부여에서 나온 것을 생각해야 하며, 북위 등 북조의 역사를 기록한 <북사>에서 3세기 말에 위구태라는 인물이 요동 지역의 맹주 공손도와 혼인 동맹을 맺으면서 백제가 ‘동이강국’이 되었다는 기록을 보면 그러하다. 위구태는 백제의 또 다른 시조라고까지 일컬어지는 인물이다(김운회 2010). 덧붙이자면, <북사>에는 ‘백제’라는 명칭의 유래를 ‘백가(百家)가 바다를 건너’(濟) 세운 나라이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 ‘요서백제’의 실체는 백제가 그들의 원적지인 곳에 구축한 세력들의 네트워크였을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김운회(2010)나 김상(2004) 등이 추리하는 것처럼, 이 네트워크는 고정된 기관이나 근거지를 가지고 있다기보다는 한반도의 소국들처럼 세력가들 간의 정치·경제적 연계로서 활동했을 수 있다.

 

또한 중국 사서에서 ‘요서백제’의 활동들이 나타나는 시기는 위·촉·오를 통일한 서진(西晉)이 자중지란과 북방 유목민족의 침투로 멸망하고 양자강 이남으로 쫓겨가며(동진), 4세기를 관통하는 북중국의 5호 16국(다섯 오랑캐가 세운 열여섯 나라들) 시대이므로 그 공간은 충분히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대분열 시대의 이 16국들 중에서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국가들은 고구려, 백제, 부여와 계속적인 투쟁 또는 친선 관계를 맺는 경우로서 모용선비(慕容鮮卑)가 세운 전연(前燕: 337~370), 후연(後燕: 384~407), 북연(北燕: 407~436), 남연(南燕: 398~410) 등이다.

 

특히 모용선비는 고구려에 떠밀려 쇠퇴하던 반농반목(半農半牧)의 연맹왕국인 부여를 공격하면서 백제와의 연결 고리를 가지게 된다. 285년 부여는 중국식 정착국가를 건설하기 전 단계였던 모용선비의 대대적인 침공을 받아 1만 명이 포로로 잡혀가는 큰 손실을 입으며, 부여 연맹 자체가 고구려의 압력으로 송화강 일대를 떠나 서쪽으로 이동했던 346년에는 전연이 침공하여 멸망 직전의 심대한 타격을 입는다. 이 사실들을 백제와 관련시킬 수 있는 것은 백제가 부여의 계승을 천명한 나라이며, 3세기 말은 위구태의 활동(요동선비와 고구려를 견제하기 위한 공손도와의 동맹)과 관련된 시기이고 346년은 근초고왕의 즉위년일뿐만 아니라 이후에는 백제가 전연·후연과 손을 잡자 고구려 고국원왕이 백제와의 전쟁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285년 1만 명, 또 이후 그 이상의 규모로 선비족 국가들에 흡수된 부여인들은 인구만으로도 상당한 비중을 차지했을 것이며, 바다를 통해 선비족 국가들과 관계를 맺은 부여족인 백제인들과 긴밀히 교류하거나 섞였을 가능성이 크다. 또 남연의 경우 그 영역이 산동반도 등 뱃길로 백제와 연결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일부 네티즌들은 모용선비 나라들의 기록에 나타나는 관료나 장군들 중 여씨(餘氏) 인물들을 주목해야 한다고 주장하는데 필자가 보기에도 탁견인 듯하다. 

 

요서백제의 쇠퇴와 ‘월주백제’(越州百濟)의 성장
그런데 광개토태왕 전쟁(391~413)과 후연의 멸망(407)을 기점으로 모용선비 국가들과의 관계는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가 주도하게 된다. 후연을 멸망시키고 북연을 세운 것은 고운(高雲)과 풍발(馮跋)인데 고운은 고구려인으로 알려져 있다. 고운은 후에 풍발에게 왕위를 찬탈(409)당하게 되지만 이후에도 북연은 고구려의 제후국과도 같은 관계를 유지하게 된다. 참고로 <삼국사기>의 고구려 본기에는 후연과의 전쟁 기록이 있지만 광개토태왕비에는 없는데, 장수왕이 세운 ‘공식적 국가기록’인 광개토태왕비에서 이미 고구려의 일부가 된 적대국을 기술해서는 안 된다는 필요성에서 그리된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한다(김상 2011).

 

후연의 멸망 이후 서해 북부와 발해만(渤海灣)에서 백제의 해상 활동 위축과 함께, ‘요서백제’의 부여인들과 백제인들의 입지는 굉장히 좁아졌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북연이나 고구려로의 완전한 흡수, 동쪽으로 이동한 원(原)부여로의 흡수, 바다 건너 백제로의 흡수, 남쪽 바다로의 진출 등이 그들에게 가능한 선택이었을 것이다. 특히 고구려 장수왕, 백제 비유왕 대에 이르러 북연의 멸망(436)은 요서백제의 운명에 거의 조종을 울리는 사건이 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북연의 멸망은 마치 2차 세계대전 초기 독일과 소련에 의해 침공당하여 영토가 분할된 폴란드를 연상시킨다. 북중국을 통일한 타브가치족의 북위와 고구려가 연달아 침공하여 북연 땅을 휩쓴 것인데, 차이점이 있다면 북위와 고구려 간에는 선약이 없었고, 고구려는 북연 국민들과 물자를, 북위는 땅을 차지했다는 것이다. 풍발의 후손 풍홍(馮弘)이 다스리던 북연은 북위의 대대적 침공 위협을 받자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한다. 장수왕은 구원군을 보내지만 사실상 침공군이라고 볼 수 있었다. 북위군과 대치하며 북연 수도 용성에 먼저 진입한 고구려군은 풍홍과 왕족, 귀족을 납치하듯 모셔가는(?) 한편 백성들에게 고구려 군복을 입혀 끌고 갔고(부여인과 백제인들이 상당수 포함되었을 것이다), 용성의 가치 있는 물자를 실어 날랐으며 성 안을 불태워버렸다. 불타버린 황무지 외에 얻을 것이 없어진 북위는 대노하여 고구려를 공격하고자 하였으나 중단했고, 두 나라의 관계는 냉각된 채 오랜 세월을 보내게 된다.

 

그런데 한족(漢族) 계통이었던 풍홍은 고구려에서 예상과 달리 푸대접을 받게 되자 몰래 동족인 남조 송에 자신을 데려갈 것을 요청한다(438). 송은 7천의 군사를 풍홍이 머물던 요동으로 파견하는데 바닷길을 이용하게 된다. 그러나 이들이 도착하였을 때 장수왕은 이미 풍홍을 척살한 상태였고 송의 군대는 손쉽게 격파 당했다. 여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송의 중심지인 건강성(建康城, 현재의 난징)에서 요동까지의 뱃길은 꽤 먼 거리임에도 상당한 해군력을 가진 고구려를 상대로 이를 시도했다는 사실인데, 매우 대담한 작전이라고 할 수 있다. 중원 왕조는 대대로 중농억상(重農抑商)의 정책을 유지하였으며 바다 뱃길을 중시하지 않았는데(김성호 1996), 장거리의 뱃길로 대규모의 군사를 보낸다는 발상은 바다와 배, 요동의 지리에 익숙한 이들의 도움을 받아야 가능했을 것이다. 양자강 하구 주산군도를 중심으로 한 해양 민족들과 요서에서 남쪽 바다로 활동 무대를 옮기고 권토중래를 노렸을 백제인들이 그 후보들이다. 월주백제(越州百濟)라고 불릴 수 있는 이들에 대해서는 나중에 자세히 살펴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다시 개로왕이 송에 보낸 국서로 돌아가 보자. 여기에서 개로왕은 무려 11명의 국내 고관들에 대한 정식 임명에 대해 송에 동의를 구하고 있는데, 굳이 국내 인사에 대해 국제적인 인정과 동의를 구하는 것은 대내적인 권력 위계를 확인하고 안정을 꾀하는 것 (김상 2011) 외에 대상 고관들 중 상당수가 대외 관계에 종사하거나 동중국, 왜에서 활동하는 제후들이어서 국제적인 홍보(?)가 필요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우현왕, 좌현왕 등의 직위를 강조하여 요서백제의 부활에 대한 의지를 덧붙였을 수 있다. 이렇게 ‘떼’로 관직 임명의 동의를 구하는 관습은 동성왕 대까지 계속되는데, 무령왕 이후에는 남조 국가들과 여전히 친밀한 관계인데도 보이지 않는다.

 

개로왕의 대(對) 송 국서를 앞서 살펴본 개로왕의 대 북위 국서와 함께 본다면 개로왕 역시 고구려의 장수왕처럼 남조와 북조 국가에 모두 통교하여 세를 과시하고 자국의 안정을 꾀하는 전방위 외교 경쟁을 벌이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러나 개로왕은 북위와의 통교에 실패했고, 장수왕은 결국 한때 냉랭한 대치를 벌였던 북위뿐만 아니라 풍홍 문제를 둘러싸고 전투까지 벌였던 송과도 통교하여 외교전에서부터 승리하게 된다. 코너에 몰린 개로왕의 ‘플랜 B'는 표면적으로는 <삼국사기>에 기록된 문주의 신라군으로 보이는데, 사실은 더 든든하면서도 위험한 플랜 B가 있었음 직 하다. 물론 장수왕과 북위에게 밀린 우현왕 방면이 아니라 좌현왕 곤지 방면이다. 미묘한 사생활과 가족 관계가 얽혀 있는 이 방면의 기록을 <일본서기>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