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군의 시대 <1> - 동성왕, 폭주를 시작하다
만월(滿月)의 삼한(三韓)백제 체제와 동성왕의 불만
495년 동성왕이 8인의 후왕(侯王)을 영산강 유역에 분봉하고 남제 황제의 승인을 얻은 일은 도읍도 아니고 성곽도 없는 영산강 유역을 사실상 ‘백제권(圈)’의 새로운 중심으로 공표한 셈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 이 지역은 대대로 전쟁의 직접적인 피해를 입은 일이 거의 없으며, 이름난 곡창지대인데다가 바다를 통해 가야, 왜국과 오월(吳越) 지역으로 통하는 교역망을 갖추고 있어 경제적으로도 풍요로웠을 것이다. 실질적인 군사적 위협으로 꼽을 수 있는 사건은 487년 가야 지역으로부터의 ‘기생반의 난’ 정도인데, 그나마 소국 통치자들의 활약과 웅진(熊津)의 조정과의 협조로 분쇄되었다.
‘백제권’ 전체로 볼 때, 동성왕의 진왕(대왕) 등극 후 십여 년이 흐르면서 남조와의 외교적 노력, 기생반의 난 진압, 백제-북위 전쟁의 승전, 나제동맹(羅濟同盟)과 고구려 접경지대의 국방 강화 등을 거쳐 ‘진왕제’(김상 2011)를 바탕으로 한 ‘삼한백제’의 소국 연맹은 어느 정도 ‘업그레이드’되었다고 생각된다. 응신계 왕통을 중심으로 ‘백제권’으로부터의 이탈을 꾀하는 왜국의 경향이 불안 요소이기는 하지만, 고구려와의 교류를 제외하면 적어도 ‘왜왕 무’ 이후 동성왕과 별개로 중원 남조(南朝)와의 ‘독자외교’를 감행하는 등의 뚜렷한 ‘독립’ 움직임은 498년의 시점까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 시기에 도읍과 조정이 있는 금강 유역의 통치자이며 ‘백제권’의 대왕(大王)인 동성왕 자신이 불안 요소로 부각되고 있었다. 475년 이후 폐허가 된 한강 유역을 대신하여 백제의 중심이자 최전방 군사요충지로 부각된 금강 유역에서 동성왕이 효율적인 군사력 동원과 전쟁 수행을 위한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귀결이었다.
그러나 494년 고구려와의 전쟁이 재개된 후, 전투가 이어지고 홍수(497년) 등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금강 유역에 ‘과부하’의 징후가 뚜렷해진 것으로 보인다. 497년 신라의 우산성이 고구려군에 함락되는 지경에 이르기까지 구원병을 보내지 못한 것도 이러한 여건 부족 때문이었을 것이다. 동성왕의 불만은 부유한 영산강 유역으로부터 필요한 대로 즉각 군사와 자원을 동원할 수 있는 실권이 없고 소국들에 산재한 후왕들의 협조를 구해야 하는 연맹 체제에 대한 것이 아니었을까 한다. 동성왕은 한강 유역이라는 한정된 지역의 군사력과 자원에 의존하다 고구려의 공격에 철저하게 무너진 선대 진왕(辰王) 개로왕의 교훈을 떠올렸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 외에 동성왕의 개인적 야망도 498년의 무력시위를 감행하는 데 한 몫 했을 수 있다. 즉 ‘월주’와 ‘왜국’까지 확대된 ‘백제권’의 명목상 대왕이 아니라 전 지역을 ‘군현’으로 두고 지방관을 파견하여 통치하는 실질적인 대왕의 지위를 꿈꿨을 것이다.
二十年 設熊津橋 秋七月 築沙井城 以扞率毗陁鎭之 八月 王以耽羅不修貢賦 親征 至武珍州 耽羅聞之 遣使乞罪 乃止[耽羅 卽耽牟羅]
20년(서기 498), 웅진교를 만들었다.가을 7월, 사정성(沙井城)을 쌓고 한솔(扞率) 비타(毗陁)로 하여금 지키게 하였다.8월, 탐라가 공물과 조세를 바치지 않는다 하여 임금이 직접 치려고 무진주(武珍州, 광주)에 이르니, 탐라에서 소문을 듣고 사신을 보내 사죄하므로 곧 중지하였다.[탐라(耽羅)는 곧 탐모라(耽牟羅)이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0년(498) 조
498년 음력 8월, 동성왕은 느닷없이 탐라(耽羅: 제주)의 무례를 명분으로 무진주(지금의 광주)까지 직접 군사를 이끌고 내려온다. 476년의 탐라 사신 기록(<삼국사기> 백제본기 문주왕 2년 조)에서 탐라 사신이 ‘은솔’에 제수되고 있는데, 좌평, 달솔에 이은 3번째 관등이다. 이로 미루어 탐라 통치자의 책봉 직위를 추측한다고 해도 2번째 관등인 ‘달솔’ 정도이니 후왕(侯王)들에 비할 바가 못 되고, 탐라의 무례가 사실이라고 해도 대왕이 나서서 친정(親征)할 일은 아닌 것이다. 당연히 다른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김상(2004; 2011) 등은 이를 동성왕의 영산강 유역 직접 통치를 위한 무력시위로 해석하고 필자도 동의한다.
물론 필자의 억측이지만, 동성왕은 탐라를 ‘정벌’한다는 뜻을 내비치며 영산강 유역 후왕들의 수군(水軍) 준비 협조를 구하는 방식으로 의도를 숨기고 기병 중심의 육군을 직접 몰래 움직여 무진주를 급습하지 않았을까 한다. 필자의 사극에서는 이 기습이 위사좌평 백가를 포함한 대부분의 조정 대신들이 군사 이동 직전에 소식을 알게 될 정도로 극비리에 이루어진 것으로 묘사될 것이며, 해남 지역 소국에 은거하던 사마(斯麻)도 예측하지 못한 불의(不意)의 사태로 그려진다.
동성왕의 무력시위와 후왕(候王)들과의 타협: 백가(苩加, 伯加)와 사마(斯麻)의 선택
百濟新撰云。末多王無道暴虐百姓...
<백제신찬>에 이르길, 말다왕(末多王)이 무도하여 백성들에게 포악한 짓을 하였다. 그리하여...
- <일본서기> 왜왕 무열(무열) 4년(502) 조 (후대의 신라 무열왕과 구분하기 위하여 ‘왜국 무열왕(무열천황)’을 ‘왜왕 무열’로 표기함)
‘면중(面中)=지금의 전남 광주’라는 지명 비정(이도학 2004)이 맞다면, 무진주(武珍州) 역시 광주를 뜻하니 동성왕의 군대가 처음으로 마주쳐 대치한 군대는 ‘면중후 목간나(木干那)’의 휘하였을 것이다. 물론 목간나를 포함한 후왕들에게는 불의의 사태였기 때문에 그들의 군대는 동성왕의 금군(禁軍)에 비할 바 없이 열세인데다 흩어져 있었을 것이다. 즉 동성왕의 요구 조건을 거절하기에는 대단히 힘든 형편이었을 듯하다.
이러니 후왕들의 눈에 동성왕의 행태는 위 기록의 표현대로 ‘무도(無道)’한 것일 수밖에 없다. 위의 <일본서기> 기록은 502년의 것이지만 그 시초가 되는 사건은 498년의 무력시위가 분명하다. 게다가 무력시위의 시기가 음력 8월, 추수가 시작되는 시점으로 군사력을 소집하기 제일 힘들고 상대방도 같은 형편이라 추정하게 되는 시기에 추수 준비에 한창일 백성들인 군사들을 강제 동원한 동성왕의 행태 또한 ‘포악’하다고 비난받을 수밖에 없다.
그러나 이 모든 결점과 비난을 감수하고 동성왕은 자신의 의지를 실현할 절호의 기회를 맞았다. 그가 원하던 것은 다음과 같은 무력시위의 ‘성과’를 통해 추정할 수 있다.
... 그러자 동성왕은 제주도의 무례를 징벌한다는 명분으로 영산강 유역에 대규모 군대를 이끌고 온다. 이후 6세기 초반 이후 영산강 유역의 유적과 유물이 점차 웅진백제 형식으로 변하는데 이들이 백제 중앙정부에서 주는 관직을 받고 중앙 정계 관료로 진출하게 된다. 마치 고려 초의 광종이나 조선 초의 태종에 의한 사병혁파 및 중앙관료로의 전환과 유사하다.
- 김상(2011), <삼한사의 재조명 2>, p.210
사극을 위한 설정이지만, ‘샤이(?) 분권주의자’인 위사좌평 백가는 동성왕의 무력시위에 참여가 봉쇄됨은 물론 계획 단계에서부터 소외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백가는 비록 최전방에 가까운 수도 웅진에서 전쟁과 국방에 필요한 중앙집권적인 정책들을 십여 년이나 수행하고 있던 처지이지만, 영산강 유역과 오월 지역, 가야와 왜국 등에서 후왕들의 활약으로 번영을 누리게 된 상황을 지켜보며 대대로 이어진 진왕(辰王) 삼한 체제를 긍정적으로 바라보고 있었을 듯하다. 또 금강 유역의 여러 가지 어려움도 영산강 유역 소국들과의 협의를 통해 원만하게 타개할 수 있다고 믿었을 수 있다.
반면 해구(解仇)를 은밀히 계승한 ‘중앙집권주의’ 세력은 동성왕의 야망에 부응하여 대왕의 권력 강화를 뒷받침하는 것으로 묘사되며, 극중에서는 병관좌평 연돌(燕突)과 그 배후로 해구의 손아래 친족인 해성(解成: 가상 인물)이 해당된다. 동성왕의 무력시위를 계획하고 정보를 은밀히 공유하는 것도 이들인데, 사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중앙집권적인 해(解)씨 왕조’를 여는 것이다. 일단 동성왕의 힘을 빌려 영산강 유역 후왕들의 ‘기를 꺾는’ 것 또한 그들의 최종 목표를 위해서는 필수적인 과정이다. 동성왕이 무력시위를 감행하여 그 의도를 명백히 드러낸 이상 이후 백가의 마음이 동성왕에게서 멀어지는 것은 자연스러운 수순이고, 백가와 해성 일파의 대립 또한 수면 위로 드러나게 된다.
한편 ‘도군(嶋君)’ 사마(斯麻)는 485년 ‘뜻밖의 여정’을 끝내고 귀국한 후 해성 일파의 속셈이 깃든 동성왕의 벼슬 제안을 거절하고 ‘낙향’을 선언하며, 해남 지역의 소국 신지(臣智)로 곤지의 측근이자 개로왕대(457)에 ‘보국장군(輔國將軍)’으로 책봉받은 부여예(夫餘乂)의 아들 부여숭(夫餘崇: 가상 인물)의 사위가 되어 그 곳에서 10년 넘게 은거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설정 상 부여숭에게는 영원(影媛)이라는 딸이 있는데 ‘아착왕’ 부여고(古)의 구애를 뿌리치고 해양 세력의 거두(巨頭)인 ‘벽중왕’ 찬수류와 결혼하며, 영원의 막내 동생 세원(世媛: 가상 인물)은 사마와 결혼한다.
필자의 사극에서 ‘기생반의 난’ 진압과 ‘백제-북위 전쟁’에서 ‘백의종군(白衣從軍)’에 가까운 역할만을 하며 은거하던 사마는 동성왕의 금군이 무진주에서 후왕들의 군대와 대치하여 내전(內戰) 직전의 상황이 되자 전면에 등장하여 타협안을 내놓는다. 사마는 백가와 같이 동성왕의 무력시위가 무도(無道)하고 백성들을 고난에 몰아넣는 짓이라고 생각하지만 백가의 복고적이고 이상적인 삼한 체제 구상에는 동의하지 않으며, 혈통 상 당연하게도 해성 일파의 음모가 깔린 움직임에도 경계를 늦추지 않는 것으로 설정된다.
김상(2004; 2011) 등의 추정을 바탕으로 사마(실제로는 다른 누구였더라도)의 타협안에 대해 ‘소설’을 써보자면 다음과 같다.
1. 동성왕의 요구 조건을 수용한다: 영산강 유역 후왕들과 신지들은 이후 동성왕이 내리는 중앙관작과 위세품을 수여받고 대왕의 모든 요구를 ‘협조’가 아니라 칙명으로 받고 실행한다. 후왕과 신지들의 영지(領地)와 조세(租稅)는 점차적으로 대왕의 소유로 복속시킨다.
2. 동성왕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는 후왕들과 신지들은 즉각 영지를 떠나 왜국으로 건너가 웅략계(雄略係), 즉 곤지계 왕실의 재건에 협력한다. 이들이 성공하면 왜국의 영지와 사병 소유를 보장받는다.
양측이 타협안(위의 내용이 아니었다고 해도)을 수용했다는 것은 이후에 ‘탐라’의 사죄 기록 뿐 별다른 내전 기록이 없다는 것에서 유추할 수 있다. 타협안 2에 해당되는 인물들과 이후의 행보는 아래에 별도로 기술할 것이다.
재난 속에서도 ‘독재’와 타락으로 가는 동성왕
二十一年 夏大旱 民饑相食 盜賊多起 臣寮請發倉賑救 王不聽 漢山人亡入高句麗者二千 冬十月 大疫
21년(서기 499) 여름에 크게 가물어 백성들이 굶주려서 서로 잡아먹을 지경이었고 도적이 많이 생겼다. 신하들이 창고를 풀어 구제하자고 하였으나 임금이 듣지 않았다. 한산 사람 2천 명이 고구려로 도망갔다.겨울 10월, 전염병이 크게 돌았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1년(499) 조
二十二年 春 起臨流閣於宮東 高五丈 又穿池養奇禽 諫臣抗疏不報 恐有復諫者 閉宮門... (중략) ... 莊子曰 見過不更 聞諫愈甚 謂之狠 其牟大王之謂乎
夏四月 田於牛頭城 遇雨雹 乃止 五月 旱 王與左右宴臨流閣 終夜極歡
22년(서기 500) 봄, 궁궐 동쪽에 임류각(臨流閣)을 세웠는데 높이가 다섯 길이었다. 또 연못을 파고 진기한 새들을 길렀다. 간언하는 신하들이 이에 항의하여 글을 올렸으나 임금이 대답하지 않고, 다시 간언하는 자가 있을까 염려하여 궁궐 문을 닫아버렸다... (중략: 김부식의 논평) ...『장자(莊子)』에 ‘잘못을 보고도 고치지 않으며, 간언하는 말을 듣고도 더욱 심해지는 것을 사납다고 한다.’고 하였는데, 아마도 모대왕과 같은 사람을 이르는 말일 것이다.
여름 4월, 임금이 우두성(牛頭城)에서 사냥하다가 비와 우박이 떨어지자 중지하였다.5월, 가뭄이 들었다.임금이 가까운 신하들과 함께 임류각에서 잔치를 베풀어 밤새도록 마음껏 즐겼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500) 조
동성왕은 498년의 무력시위를 통해 자신의 의도를 관철했지만, 그 다음 해의 금강 유역은 여전히 재난의 연속이다. 가뭄과 굶주림, 백성들의 도주, 전염병이 ‘세트’로 발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은 식량 창고를 여는 것조차 거부하고 있다. 이쯤 되면 백가는 물론이고 내심 동성왕의 추락을 바라며 ‘딴 마음’을 먹고 있는 해성 일파라고 해도 간언할 수밖에 없음직한데,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막고 있었던 것이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동성왕 22년(500)의 기록은 재난 상황이 나아지지도 않는 상황에서 사치를 일삼는 전형적인 폭군의 모습을 묘사하고 있다. 그 유명한 임류각이 세워졌고, 4세기 말 진사왕(辰斯王)의 기록에서 보듯이 ‘백제 폭군’의 클리셰(cliché)라 할 수 있는 ‘연못정원 조성과 진귀한 새 기르기’도 등장하고 있다. 외국 정복도 아니고 국내의 유력한 세력을 굴복시킨 것에 대해 과도한 자만심을 가지고 영산강 유역으로부터 모이기 시작한 부(富)를 활용하여 대왕(大王)의 위세를 만끽하고자 했을 것이다. 필자의 사극에서는 이것에 더해 모종의 개인적인 콤플렉스가 심화되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그러나 동성왕의 폭군 행각에서 핵심은 ‘불통(不通)의 아이콘’이 되어가는 것이다. 김부식은 <삼국사기> 기록에 종종 논평을 남기고 있는데, “역사가가 아닌 문장가”로서 “기록의 내용을 대부분 이해하지 못했음을 보여주고 있다”(김상 2011)고 평가될 정도로 ‘인상 비평’에 가까운 엉뚱한 해석이 자주 보이는 반면(백가에 대한 논평이 대표적이라고 생각한다), 동성왕의 폭군화(化) 기사에 대해서는 <장자>를 인용하며 비교적 타당한 논평을 보여주고 있다. 동성왕의 성정(性情)이 개신교적인 표현으로 ‘완악(頑惡)해지는’ 과정을 잘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500년 4월, 동성왕이 사냥에 나섰는데 우박이 떨어지는 상황은 옛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하늘의 진노’를 떠올렸을 것이다. 그럼에도 다음 달에는 어김없이 가뭄이 찾아오고 있는데 임금은 잔치나 즐기고 있다. 극중 금강 유역 백성들과 백가의 시름이 깊어지고 해성 일파는 ‘해씨 왕조’ 건설의 단계적 계획을 실천하기 시작한다. 이제 ‘백제권(圈)’의 내전은 예정된 것이나 다름없다.
* 스토리 설정: 열도(列島)에 부는 후폭풍-영산강 세력의 대거 도왜(渡倭)
극중 498년의 무력시위를 감행한 동성왕의 요구 조건에 저항하는 후왕들은 사마가 제안한 ‘타협안 2’에 따라 대거 왜국으로 건너가는 것으로 설정되며, 다음과 같다. 필자는 사마를 제외한 498년의 도왜 인물들을 <일본서기>의 등장인물과 일치시켰다. 열도의 소용돌이를 다루는 다음 포스팅에서 등장하는 인물들이 각각 누구와 동일 인물일지는 아래의 설정에서 충분히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도군 사마(嶋君 斯麻: 夫餘隆): 사마는 타협안의 제안자이면서 동성왕의 신하임을 천명했기 때문에 본국에 남아도 되는 상황이었지만, 부인 세원(世媛: 가상 인물)과 어린 아들 명(후의 태자 명농(明穠), 즉 성왕)을 비롯한 자식들을 남겨둔 채 일시적인 왜국행을 자청(自請)한다. 물론 그의 왜국행은 후사가 없는 동성왕의 후계와 관련한 끝없는 경계로부터 더 벗어나는 의도도 있지만, 주요한 목적은 곤지계 왜왕을 옹립하는 것으로 염두에 둔 후보는 그보다 한 살 많은 배다른 형(김상 2011)인 사아군(斯我君)이다. 사아군은 곤지와 한원(韓媛) 사이의 3자(김상 2011)로, 어머니 한원의 죽음과 관련된 사연으로 죄책감에 휩싸인 채 왜국 곳곳을 방랑하며 어린 시절을 보내다 응신계 왕족인 언주인(彦主人)이라는 열도의 소국 왕과 진원(振媛) 부부의 양자로 입적되어 세력을 갖추는 것으로 설정된다.
벽중왕 찬수류(辟中王 贊首流): 오월 지역, 영산강 유역, 열도에 이르기까지 광범위한 해상 교역망을 통해 큰 세력을 구축하고 혁혁한 전공(戰功)까지 있는 찬수류에게 동성왕의 굴욕적인 요구 조건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었다. 찬수류는 열도의 토착 세력가로 억계왕의 사후 실권을 장악하게 되는 평군진조(平君眞鳥)와 ‘부자지간’으로 불릴 정도로 깊은 유대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이참에 왜국으로 그의 본거지를 옮기고자 하여, 17세의 아들 마나군(麻那君)을 비롯한 장성한 자식들만 해남 지역 소국에 남겨놓은 채 부인 영원(影媛)을 대동하여 왜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런데 영원과 같이 떠나는 이 선택은 곧 닥쳐올 소용돌이의 빌미가 된다.
보국장군 부여숭(輔國將軍 夫餘崇: 가상 인물): 한 때 동성왕의 사슴 사냥에 동행하여 신라와의 혼인 동맹 아이디어를 낸 실력자였던 부여숭이지만, 이제 정적으로 표변한 동성왕의 칼끝을 피하고자 하는 해남 지역 소국의 통치자로서 두 사위(사마와 찬수류)의 선택을 따라 동행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물론 다가오는 횡액을 예상하지 못한 것은 그들과 마찬가지였다.
면중후 목간나(面中候 木干那): 찬수류와 같이 495년 후왕 책봉 후 오월 지역을 떠나 영산강 유역으로 이주한 백제-북위 전쟁의 공신(功臣) 목간나 역시 동성왕의 요구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고 모든 가족을 데리고 왜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퇴로’를 만들어놓지 않은 그의 선택은 왜국에서 벌어지는 소용돌이 속에서 어려운 딜레마에 직면하는 원인이 된다.
아착왕 부여고(阿錯王 夫餘古): 부여고는 일찍이 기생반(紀生磐)과 그의 세력을 도륙하여 임나(任那)의 세력 네트워크를 손아귀에 넣은 것을 기화로 왜국의 응신계 왕실과 연관을 맺게 되며, 이 관계를 활용하여 사마와 후왕들의 왜국행과 평화적인 곤지계 왕실 회복을 돕는다는 명분으로 그들과 동행한다. 그런데 그의 오랜 야망, 그리고 애증(愛憎)이 얽힌 병적인 집착은 ‘심증’ 이상의 ‘물증’을 보여준 적이 없으므로 아무도 그가 벌이게 되는 사태를 예상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