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內戰)의 시대 <2> - 남제 소연(蕭衍)의 동혼후 타도와 왜국 계체왕(繼体王)의 등장
무령왕(武寜王, 斯麻, 夫餘隆, 462~523, 재위 501~523):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25대 왕. <삼국사기>는 그가 ‘동성왕의 둘째 아들(二子)’이라고 기록하고 있으나 다분히 ‘법적’인 ‘입적(入籍)’관계를 일컬었을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생각된다. 반면 <일본서기>에는 곤지(昆支)의 도왜(渡倭) 상황과 함께 각라도(各羅島, 가카라시마)에서의 출생과 귀국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는데 무령왕릉 지석에서 밝혀진 무령왕의 출생 연도와 시기가 일치하여 더 정확한 기록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무령왕이 곤지의 아들인지 또는 개로왕의 아들인지, 그리고 동성왕의 배다른 형(異母兄)인지 동생인지에 대해 8세기 <일본서기> 편찬자들조차도 헷갈려하며 모순되는 판단을 하고 있다. 한편 <역주 일본서기>(2013)의 역주에서는 무령왕을 곤지의 아들로 추정하고 있다.
무령왕의 용모와 성격에 대해 <삼국사기>는 “키가 8척이고 눈썹과 눈이 그림과 같았으며 인자하고 관대하여 민심이 그를 따랐다”고 묘사하고 있다. 그러나 40세 즈음에서야 즉위하는데 그 이전 행적에 대해서는 왕릉 지석은 물론 어느 사서에도 기록이 없다.
소연/양 무제(蕭衍/梁 武帝, 464~549, 재위 502~549): 남제의 건국자 소도성(蕭道成)의 족제(族弟)인 소순지(蕭順之)의 아들로 어려서부터 문무에 탁월했고, 특히 문인 귀족과 교류하여 경릉팔우(竟陵八友)의 한 사람으로 꼽힐 정도로 문재(文才)를 보였다고 전한다. 장성하면서 북위와의 전쟁에 참여하여 전공을 세우며 무장으로서도 명성을 얻었다. 498년 폭군 동혼후(東昏侯)가 즉위하여 폭정을 일삼고, 500년 11월에 이르러 맏형인 상서령 소의(蕭懿)가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자 당시 옹주자사(雍州刺史)로 있던 그는 마침내 거병하여 양자강 중류 남부의 옹주와 형주(荊州) 세력을 규합하면서 건강성으로 진군했다.
계체왕(繼体王, 재위 503~531 또는 507~531): 남대적(男大赤: 오오토)이라는 이름을 가졌으며, <일본서기> 기록상 왜왕 무열(武烈)의 다음 왜왕. 응신왕의 혈통으로 507년 57세에 즉위하여 81세에 훙(薨)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실제 나이는 물론 계보가 불분명하고 궁을 여러 번 옮기는 기록 등으로 볼 때 혈통과 왕위 계승 과정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으며, 재위 기간 동안 백제와 관련한 기록이 크게 증가하고 있는 것 또한 주목할 만하다고 한다(<역주 일본서기> 2013). 김상(2011)은 계체왕을 <일본서기>에 505년 (또는 503년) 백제에서 도왜(渡倭)한 것이 기록된 백제 왕족 사아군(斯我君)과 동일 인물로 추정하고 있으며, 사실상 이 해에 왜왕 무열이 폐위되고 왜국의 정권이 교체되는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일본의 국보인 우전팔번신사 소장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所藏人物畵像鏡), 즉 일명 ‘계미년 동경(癸未年 銅鏡)’에 적힌 명문은 503년 ‘사마(斯麻)’의 제작 명령과 ‘남제왕(男弟王: 오토)’에 대한 수여가 적혀 있는 등 이때의 정황을 추정하는 데 있어 매우 중요한 기록이다.
남제: 옹주자사 소연의 건강성 진격
500년 11월, 백제에서 동성왕이 저격당하기 1년 전 남제에서는 이미 소연이 폭군 동혼후를 타도하는 반란을 일으켰다. 반군(反軍)의 기반은 소연이 자사(刺史)로 있던 양자강 중류 남부의 옹주였으나 진군하면서 그 세가 크게 늘어났고, 특히 형주에서 동혼후 소보권의 동생인 12세의 남강왕 소보융(南康王 蕭寶融)을 보좌하던 서중랑장사 소영주(蕭潁腺)와 연합하고 후에 양 왕조에서 활약하게 되는 무장(武將) 조경종(曺景宗), 위예(韋叡) 등의 다수 세력들이 합류하니 건강성 서부로 가는 길목의 요충지들을 장악하게 되었다(<상선약수(上善若水)> 2015). 그리하여 소연의 반군은 501년 3월 소년 왕족 소보융을 황제(시호는 화제 和帝)로 옹립하니 동혼후 소보권과 정면 대결 구도가 성립되었다.
반군이 세력을 크게 키우고 민심을 장악해가며 건강성으로 접근하고 있음에도 동혼후 소보권은 과거 수차례의 반란 시도가 모두 실패로 끝난 경험에 기대어 개의치 않고 기행(奇行)을 일삼았다. 경치 좋은 곳에 있는 저자거리의 민가를 강제로 헐어버리고 정원을 만드는가 하면, 환관들과 예의 시장 상인놀이를 계속하며, 죽은 명제 소란이 자신을 꾸짖는다는 무당의 말에 격분하여 아버지 소란의 형상을 만들어 신하처럼 북면(北面)하게 하고 목을 베어버리는 패륜적인 퍼포먼스를 벌이는 식이었다(<상선약수> 2015).
501년 10월에 이르러 반군이 건강성에 다다르자 소보권은 왕진국(王珍國) 등으로 하여금 대군을 이끌고 반군에 맞서게 했으나 참패하니 판세가 크게 기울었다. 소보권은 관군이 대패하자 아직 자신의 군사가 많은데도 궁에 틀어박혀 현실도피적인 놀이에만 탐닉하니 이에 실망한 왕진국은 반군과 내통하여 501년 12월 소보권의 목을 베어 소연에게 보냈고, 건강성은 곧 함락되었다. 이 때 소보권은 채 20세가 되지 않았다.
화제 소보융과 함께 입성한 소연은 약탈 등을 금지하고 소보권의 애첩 반비(潘妃)를 교살(絞殺)하는 등 ‘국정 농단’의 주역 41명을 처형하니 민심이 안정되었다. 반군의 지도자 소연이 수도를 함락시키고 숙청을 단행하며 실권자로서 전면에 나서자 누가 보아도 그가 모시고 온 폭군의 친동생, 소년 황제 소보융은 그저 이름뿐인 황제였다. 502년 3월, 소연이 소보융으로부터 양위를 받아 제위에 오르며 나라 이름도 ‘양(梁)’으로 고치니 그가 양 무제(梁 武帝)이다.
건강성(현재 남경)의 서부 방어성인 석두성(石頭城)의 성벽. (2014. 7)
* 스토리 설정: 남제의 정권 교체와 ‘대륙백제’의 선택
필자의 사극에서 소연(蕭衍)은 남제의 신동(神童) 왕족으로 소년 시절부터 등장하는 비중이 큰 조연인데, 478년(소연은 14세) ‘왜왕 무(武)’의 사신단에 포함된 ‘대륙백제’의 주요 인물들 및 사마, 백가와 조우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특히 그보다 약간 높지만 비슷한 연배의 사마와 문재(文才)를 겨루고 견제하는 에피소드가 포함되어 있다.
소연은 걸출한 능력과 명성을 갖추기는 하지만, 남조(南朝)의 내륙 농업 생산력에 기반을 둔 문치 귀족의 일원임을 자처하는 엘리트주의와 중농(重農) 정책에의 경도, 중화주의(中華主義)를 표상하는 인물로 설정된다. 즉 ‘대륙백제’와의 관계가 껄끄러울 수밖에 없고, 그 실체적 세력과 남제 정권에 대한 기여에도 불구하고 이들을 내심 그저 ‘오랑캐 용병(用兵)’이자 ‘신민(臣民)’으로 여기는 태도를 줄곧 보인다. 그의 형 소의도 마찬가지 인식을 가지고 있어서 북위와의 전쟁 참전에 있어 오월 지역 백제군(軍)의 실질적 수장인 해례곤(解禮昆)과의 마찰을 빚는 원인이 된다.
501년, 이런 소연이 반란을 일으켜 건강성에 접근하자 민심이 돌아선 폭군 동혼후를 지지할 수는 없는 ‘대륙백제’의 지도자들은 고민 끝에 결국 중립 입장에서 돌아서서 소연의 반군을 소극적으로 지원하기로 한다. 하지만 그럼에도 소연이 건강성에 입성한 후 501년 12월, 내전 수습 과정에서 성내의 백제인들이 도리어 동혼후의 폭정에 책임이 있는 세력으로 지목되어 체포되자 해례곤 등은 분개한다. 필자의 무리한 설정일 수도 있지만, 특히 해례곤의 부인 백선(가상 인물, ‘폭군의 시대 <3>’ 포스팅 참조)도 유폐에서 풀릴 때 반비(潘妃) 부녀의 도움을 받은 전력 때문에 체포되고 격분한 해례곤은 2만에 가까운 백제군 정예 병력을 휘몰아 건강성으로 달려 코앞에 다다른다. 그러나 소연의 군사력은 백제군의 몇 배가 되고 건강성이라는 대성(大城)을 지키고 있으므로 백제군의 병력은 공성전(攻城戰)에는 턱없이 부족한 상황이다. 이 대치 상황은 같은 시기 백가의 가림성 농성과 교차되어 묘사된다. 대치를 계속하는 이 때 밀서 두 통이 주산군도의 월지향(越枳香, 가상인물, ‘폭군의 시대 <3>’ 포스팅 참조)과 건강성의 소연에게 각각 전해진다. 갓 백제 대왕으로 즉위한 무령왕 사마(斯麻)가 첫 칙명으로 보낸 서신이다.
해례곤과 백선 부부의 재상봉 여부를 비롯해 이후의 사건 설정과 전개는 극에서 보이게 될 것이다. ‘역사의 스포’가 알려주는 바는 6세기 전반기(前半期) 내내 백제와 양 왕조의 관계는 그 이전과 이후에 찾기 힘들 정도로 긴밀하고 활발한 교류가 이루어지게 된다는 것이니 ‘해피엔딩’이다. 물론 이는 양 무제 소연의 개심(改心)보다는 백제의 실체적인 세력 구축과 두 나라의 상호 이익 관계가 크게 작용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왜국: 503년, 분명히 어떤 큰일이 있었다
武烈天皇六年 冬十月。百濟國遣麻那君進調。天皇以爲。百濟歷年不脩貢職。留而不放。
무열천황 6년(504, 김상(2011)의 기년 조정 502) 겨울 10월에 백제국이 마나군(麻那君)을 보내어 조(調)를 바쳤다. 천황이 백제가 몇 년간 조공하지 않았다고 하여 사자를 억류하여 돌려보내지 않았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 6년(502년 또는 504년) 조 (번역 <역주 일본서기>)
武烈天皇七年 夏四月。百濟王遣斯我君進調。別表曰。前進調使麻那者非百濟國主之骨族也。故謹遣斯我奉事於朝。遂有子。曰法師君。是倭君之先也。
무열천황 7년(505, 김상(2011)의 기년 조정 503) 여름 4월에 백제왕이 사아군(斯我君)을 보내어 조공하였다. 별도로 “지난번에 조공한 사신 마나는 백제국주의 골족(骨族)이 아닙니다. 그래서 삼가 사아(斯我)를 보내어 조정에 봉사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표를 올렸다. 이윽고 자식이 생겨 법사군(法師君)이라고 하였다. 이가 곧 왜군(倭君: 야마토노키미)의 선조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 7년(503년 또는 505년) 조 (번역 <역주 일본서기>)
癸未年 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在意紫沙加宮時 斯麻念長奉(壽)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畢 作此鏡
계미년(503년이 유력) 8월 10일 대왕의 해(大王年)에 남제왕(男弟王)이 오시사카궁(意紫沙加宮)에 있을 때 사마가 (남제왕의) 장수를 기원하여 개중(開中, 가와치(河內) 지역으로 추정)의 비직(費直) 벼슬에 있는 예족 사람 금주리(今州利) 등 두 사람을 보내 양질의 백동(白上同) 200덩어리를 얻게 하여 이 거울을 만들다.
- 우전팔번신사 소장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 所藏 人物畵像鏡, 일본 국보 考古 2호) 명문(銘文)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김운회(2010), 김상(2011) 등을 참고하여 필자가 번역)
<일본서기> 기록에서 ‘일본’, ‘천황’ 등은 5~6세기의 왜국에는 없던 국명이나 군주에 대한 존칭이다. 또한 ‘조공’이니 ‘백제국주’니 ‘조정에 봉사’니 ‘표를 올리’니 하는 표현도 후대의 일본인 입장에서 곡필한 것에 불과하며, 당시 백제와 왜국의 위상은 <일본서기> 기록에서와는 반대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이다. 같은 뿌리를 가진 한국은 물론 당대의 외국들을 마음껏 격하하며 ‘최고지도자’를 한없이 드높이는 북한의 외교 성명에 담긴 멘탈리티를 생각하면 <일본서기>의 곡필에 스며든 태도를 쉽게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예부터 세월이 지날수록 ‘열도’의 인구와 경제의 성장에 비례하여 ‘반도’로부터의 자립 의식과 ‘독립’ 추구 의지가 높아갔을 것이라는 점은 인정할 수밖에 없으나, 6세기 초의 상황으로 볼 때 그런 ‘굴기(崛起)’를 실현하는 것은 아직 100년 정도를 기다려야 했을 것이다. 즉 위의 <일본서기> 기록들과 ‘계미년 동경’ 명문은 동성왕 이후 ‘삼한백제 진왕(辰王)’의 새 버전인 ‘대왕(大王)’위에 오른 무령왕이 왜왕 무열의 ‘천적’이나 새로운 왜왕 후보를 파견하여, 498년 웅략계도 응신계도 아닌 무열의 쿠데타로 손상된 백제의 왜국 통제를 복원하려는 시도와 그 성공을 의미할 수 있다.
김상(2011)은 <일본서기>의 왜왕 무열 조 기록에서 정책적 과오에서 비롯된 실패 기록은 없는 대신 무열의 너무나 끔찍한 여섯 가지 악행 기록이 각기 다른 해 다른 달에 기록된 점을 주목하여 다음과 같이 기년 조정을 하고 있다.
...사건의 달을 보면 하나도 안 겹치는데 이는 재위기간 내내 악행만 저지른 것으로 만들기 위하여 한 해에 일어난 사건을 여기저기 나누어 배치했기 때문이라고 본다. 아니면 악행 자체가 실제로 있었던 일이 아니라 다음에 올 남제왕(훗날의 계체천황)의 출현을 정당화하기 위하여 일본서기 편자들이 과장하여 넣은 것일 수도 있다. ... (중략) ... 따라서 이 6가지 악행 기록은 제외하고 읽어야 무열천황조가 보인다.
6개의 악행 기록을 제외하면 무열의 8년 재위기간이 다음처럼 6년만 남게 된다. 이 중에 천황이 8년째에 죽었다는 것은 공위기간을 없애기 위한 조치로 마지막 사건인 무열 7년 4월 이후에 죽었다고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따라서 이것을 제외하면 5년뿐이다. 그러면 일본서기의 기년이 다음처럼 정정된다.
...(중략)...
- 무열천황 4년(501): 501년에 있었던 동성왕의 죽음을 기록함.
- 무열천황 6년(502): 가을 9월, 소박뢰사인을 두게 함. 겨울 10월, 백제국이 마나군을 보내 조공함. 천황이 백제가 다년간 공납을 하지 않았다 하여 억류하고 돌려보내지 않음.
- 무열천황 7년(503): 여름 4월, 백제왕이 사아군을 보내 조공함.
- 무열천황 8년(504): 겨울 12월, 천황이 죽음.
505~506: 공위기간, 대반금촌대련이 통치.
507년에 계체가 즉위함.
...(중략)...
502년은 무령왕이 즉위한 다음 해다. 이 해 10월 조를 보면 무령왕이 보낸 마나군을 억류하는데 무령왕과 무열 사이의 협상이 깨진 것이다. 마나군을 억류한 원인이 공물 문제인 것으로 보아 무령왕은 본래 경제적인 지원을 통해 무열을 자신의 통치권 아래에 두려 했을 것이다. 즉 무령왕은 동성왕의 삼한백제 흡수 정책을 계승하여 시행하는 것이다.
...(중략)...
502년 10월에 있었던 무령왕과 무열 사이의 협상이 결렬되고 504년 12월에 무열이 죽는 것으로 볼 때 그 사이인 503년에 무열의 정치 생명을 결정짓는 어떤 대사건이 벌어졌을 가능성이 있다. 그리고 그 사건은 무령왕에 의해 주도되었으며 무열 다음 왕인 계체가 즉위하는 발판이 되었을 것이다.
일본서기 편자들은 무열을 희대의 폭군으로 그려 대단히 꺼려하였다. 만일 인현의 재위기간을 무열대까지 연장하고 무열을 삭제하거나 아니면 大臣 정도로 격하하면 이후 소아씨에게 천황위를 주지 않은 것처럼 무열을 천황력에서 배제할 수도 있다. 하지만 계체 이전의 진왕제를 따른 기간에 그가 자립위왕의 조건을 만족하였기 때문에 천황위를 주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후략)
- 김상(2011), <삼한사의 재조명 2>, p.212-215.
‘계미년 동경 명문’의 해석에 있어서도 김상(2011)은 다음과 같이 추리하고 있으며, 필자도 상당 부분 동의한다.
계미년 동경의 대왕년에서 대왕이란 본래 담로제하에서의 진왕을 일컫는 말인데 당시의 진왕인 대왕은 무령왕이었다. 따라서 대왕년이란 ‘사마대왕의 해’ 또는 ‘백제대왕의 해’라는 뜻이다. 무령왕릉지석을 보면 왕의 죽음에 대하여 중국식 천자의 죽음에 쓰는 용어인 崩을 사용하였다. 따라서 자립위왕에 성공한 진왕급 지도자는 죽음에 崩을 사용했다고 보인다.
...(중략)...
(1) 503년 8월에 남제왕은 오사카 부근의 의자사가궁에 있었다.
-> 일본서기가 백제 사아군이 503년 4월에 왜국에 왔다고 하였으므로 도착 후 4개월 만에 만들어졌다.
(2) 6세기 초에 오사카 지역의 행정장관은 비직이라는 직책을 가진 예족 출신의 금주리였다.
-> 훗날의 계체천황인 남제왕이 아니었다.
(3) 6세기 초에 오사카 지역의 행정장관은 무열천황이 아니라 백제 무령왕의 명령을 따르고 있었다.
-> 당시 왜국의 통치자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다. 천황으로 기록된 무열의 통치 지역은 왜국에서도 아주 일부에 불과하였다.
(4) 503년에 무령왕이 남제왕에게 권력을 승인하고 있었다.
-> 고대에 동경은 단순한 선물이 아니라 권력의 증표였다. 따라서 동경을 주는 것은 권력을 승인하는 것이다. 신공 52년조를 보면 백제로부터 칠지도와 칠자경이 함께 왔는데 이 칠자경은 권력의 인정을 뜻한다. 무열이 힘이 있었다면 남제왕에게 동경이 가는 것을 막았을 것이다.
...(중략)...
계체의 나이도 고사기는 무령왕보다 1살이 많고 일본서기는 11살이 많다고 하여 남제왕이 사마왕의 동생일 가능성은 없다고 본다. 일본서기는 계체의 아버지를 숨긴 채 단지 유년일 때 아버지를 잃었다고 하는데, 477년 7월에 웅략이 문주-해구 연합에게 죽을 때 무령은 16세였다. 계체는 고사기를 따르면 17세요, 일본서기를 따르면 27세인데, 어릴 때 아버지를 잃었다면 고사기의 기록이 맞는 것으로 보인다.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태어날 때 곤지가 이미 5명의 아들이 있다고 하고서는 웅략은 1, 3, 4자만 적고 곤지는 2자만 적어서 5자가 행방불명이다. 이는 고의적인 것인데 나는 계체가 곤지의 다섯 번째 아들이라고 생각한다...(후략)
- 김상(2011), <삼한사의 재조명 2>, p.217-219.
6세기 초 즉위한 계체왕은 왜국의 새로운 왕통을 연 중시조(中始祖)격의 인물로 평가되곤 하는데, 그를 일컫는 남제왕(男弟王)이라는 명칭은 무령왕 사마의 동생이라는 의미가 아니라 남대적(男大赤)이라는 계체왕의 이름과 같은 발음에서 비롯된 것(김운회 2010)과 동시에 백제와 왜국의 관계를 ‘형제(兄弟, 백제가 ‘형’)’로 정리하는 의미를 가질 수도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12세기의 금(金)이 고려에게, 17세기 초 후금(後金)이 조선에게 요구했던 ‘형제 관계’를 떠올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6세기 백제의 왜국에 대한 영향력은 이보다는 더 강력했을 수 있다. 계체왕 이후 한 세기 가량 왜국은 독자적인 중원 외교를 하지 못하고 백제가 외교권을 행사하며, 백제 대왕의 요청에 순순히 응하는 관계가 지속되었다는 것이다. 다음은 필자가 <백가제해> 열전 에필로그 포스팅에서 언급할 6세기의 백제와 왜국에 대한 김상(2011)의 추정이다.
...계체 이후의 왜국은 백제의 좌평급 각료인 대신과 대련들이 통치하는 지역이었다. 그러니 왜국은 6세기에 중원왕조에 독자적으로 사신을 보낼 수 없는 것이고, 당시 왜국의 국가원수는 <무령왕-성왕-위덕왕>으로 이어졌던 것이다. 이는 마치 과거 호주의 국가원수가 영국여왕이었던 것과 유사하다. 성왕의 戰死에 대하여 삼국사기보다 일본서기가 훨씬 자세하고 길게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자신들의 왕이 죽었기 때문이다.
<소아도목-소아마자-소아하이-소아입록>으로 이어지는 소아씨 대신들은 이전의 왜왕들 못지않은 권력자들이었다. 특히 소아마자는 7세기 초에 북해도를 제외한 일본열도 전역을 일본사 최초로 통일한 인물로서 수나라에 사신을 보내 해뜨는 나라의 왕을 자처한다. 백제의 영향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소아씨를 타도한 천지-천무계열은 훗날 역사서를 쓸 때 그들을 모두 천황에서 제외하고 적절한 인물들을 선택하여 천황의 왕통을 만들었다...
- 김상(2011), <삼한사의 재조명 2>, p.225.
에필로그 포스팅에 앞서 다음 포스팅은 6세기 초 백제의 역사 무대인 부여 가림성의 답사 포스팅이다.
일본 우전팔번신사 소장 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所藏人物畵像鏡) (출처: 위키피디아 '계미년 동경' 항목)
* 스토리 설정: 무령왕의 내전 수습, 왜왕 무열의 몰락과 사아군 계체의 왜왕 즉위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령왕 조의 초기와 중기 기록은 502년 1월 ‘백가의 난’ 수습을 시작으로 11월 고구려 수곡성(水谷城) 기습, 503년 배후에 고구려가 있는 것이 틀림없는 말갈의 고목성(高木城) 침공 격퇴, 506~507년 말갈과 고구려의 고목성과 횡악(橫岳) 재침 격퇴, 512년 고구려의 침공 격퇴 등 고구려와의 전투로 점철되어 있다. 병사 5천(502, 503년), 기병 3천(512년) 등 반도의 여건을 고려하면 동원된 병력도 대규모이다.
<삼국사기> 무령왕 조 502년과 506년에 기록된 가뭄과 전염병 등 만만찮은 내우(內憂)에 이를 기회로 삼은 고구려의 침공이라는 외환(外患)이 겹치고 있는 셈인데, 동성왕 대와 다른 점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전투에 승리하고 있으면서도 “창고를 열어 백성들을 구제”하고(506년), “제방을 보수”하며 “중앙과 지방(영산강 유역까지 포함한 ‘반도’ 내 지역일 듯)의 놀고먹는 자들을 모아 농사를 짓게” 하는 (510년) 등 유효한 대책을 통해 극복하고 있다는 것이다. 또 이러한 대책들이 무령왕 대에도 백제의 중앙집권화가 진행되고 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즉 극중 무령왕은 백가의 난 수습 과정에서 중앙과 지방의 고위급 반대 세력을 정리하며 ‘업그레이드’되고 신중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해나가는 것으로 그려진다.
필자의 사극 결말 부분의 주요 내용은 ‘백가의 난’의 수습과 ‘대륙백제’와 양 왕조의 관계 정립이 될 것이고 무령왕 사마, 백가, 해성(가상인물), 해명, 신소도국 여천군(가상인물, 아직 캐릭터의 이름을 정하지 못했음), 백선(가상인물), 해례곤, 월지향(가상인물), 양 무제 소연 등의 인물들이 얽혀 ‘백제권(百濟圈)’과 양 왕조의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과정을 그릴 것이지만, 빠른 템포로 소략하게 추가할 수밖에 없다 하더라도 그 마무리에 빠질 수 없는 내용이 시기상으로도 가장 나중 순서인 백제와 왜국의 관계 정립이다.
위에서 보았듯이 502년에서 507년에 이르는 시기에 반도의 무령왕은 내우외환의 극복에 여념이 없을 시기이다. 그러나 극중 즉위 전 오랜 세월에 걸친 우여곡절을 통해 반도, 열도, 대륙의 주요 지역을 고루 경험하여, 찬수류 정도를 제외하면 등장인물 중에서도 가장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되는 무령왕은 대륙과 열도의 ‘백제권’에 대한 조치를 빼놓지 않게 된다.
이미 필자는 김상(2011)의 왜국사 해석을 대부분 수용하여, 왜왕 무열의 쿠데타 과정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부여고, 찬수류, 목간나 등 영산강 유역 후왕(侯王)들로 설정한 바 있다(‘폭군의 시대 <1>, <2>’ 포스팅 참조). 498년 사마가 사아군의 왜왕 옹립을 이미 시도했는데 부여고의 쿠데타로 실패하였으며, 찬수류는 부여고에게 죽고 목간나는 부여고의 강요로 찬수류와 사마를 배신하고 왜국의 신료가 되는 설정이었다. 또 반도 해남 지역 소국의 공주이자 해양의 실력자 찬수류의 부인으로 설정된 영원(影媛)은 오랜 세월이 지나도 그에 대한 집착을 버리지 못한 부여고와의 삼각관계에 놓여 있었는데 찬수류를 죽인 부여고의 청혼 강요를 거절하고 열도에서 떠나는 것으로도 설정했다.
6세기 초의 상황으로 돌아오면, 극중 무령왕이 왜국 문제를 해결하는 설정은 다음과 같다. 502년 무령왕은 영산강 유역의 신지(臣智)들 중에서 왜국으로 사신을 파견하고자 하는데 자원한 이가 마나군(麻那君)이다. 앞서 필자는 마나군을 찬수류의 아들로 설정했으니(‘폭군의 시대 <1>’ 포스팅 참조, 백제왕족이 아니라는 <일본서기>의 기록에도 부합한다), 왜왕 무열은 마나군에게는 불구대천의 원수이다. 자신이 찬수류의 아들이라는 사실과 원수를 갚겠다는 목표를 숨기고 백제 조정의 경제적 회유책을 받들어 왜국으로 간 청년 마나군은 부여고 저격에 실패하고 억류된다. 그럼에도 부여고가 마나군을 죽일 수 없는 것은 마나군이 백제 조정을 대표하여 왔을 뿐만 아니라 부여고가 ‘사랑’한다고 주장하는 영원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다음해(503년) 무령왕은 드디어 사아군(斯我君)에게 명하여 웅략계로의 왜국 정권 교체를 거듭 추진한다. 다시 왜국으로 건너온 사아군의 우군(友軍)은 뜻밖에 5년 전 배신행위의 속죄를 호소한 대련(大聯) 목간나, 그리고 무령왕의 명에 따라 왜왕의 증표인 구리거울을 제작한 비직(費直) 금주리이다. 신중을 기하기 위해 사아군의 왜왕 옹립을 늦춘 목간나와 금주리는 우선 부여고의 모든 권력을 회수하고 그를 유폐시킨다. 영원을 떠나보내고 왜왕위에 올랐던 부여고는 날이 갈수록 쌓여가는 분노로 인한 잔인한 악행이 잦아지던 차에 유폐된 후 광증(狂症)이 심해지다 결국 오래지 않아 죽게 되고, 사아군이 드디어 왜왕위에 오르니 ‘백제권’의 재탄생이 마무리되는 순간이다.
* 카메오 열전 (7): 왜국 금주리(今州利, 생몰 연대 불명)
금주리는 <한민족문화대백과사전>의 ‘계미년 동경’ 항목에서는 ‘관직명’이면서 ‘동경 제작 기술자’ 정도로 추정하고 있으나, 필자는 김상(2011) 등을 따라 인명(人名)이면서 ‘오사카 지역의 행정장관(비직)’이라는 추정을 따르고자 한다.
극중 금주리는 학식이 있는 부여계 왜인으로 젊은 시절 곤지의 열도 원정군에 의탁하여 곤지의 진격과 왜왕 즉위 과정을 꼼꼼히 기록하게 되고, 이후 웅략계, 응신계, 무열 등의 잦은 정권 교체에도 불구하고 40년 넘게 비직의 직책을 수행한 ‘행정의 달인’이자 ‘처세의 달인’으로서 사아군의 왜왕 즉위에도 큰 역할을 하는 것으로 설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