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남 공주 일대 <1> - 5~6세기 백제의 ‘전시(戰時) 수도’ 공주
5~6세기 백제의 수도 웅진성(熊津城, 곰나루)인 충남 공주를 처음 제대로 방문해본 것은 2010년 10월이다. 당시는 ‘세계백제대전(大展)’이라는 지역축제가 열리던 공주와 부여로 향했는데, 계획에 없이 부모님과 함께 간 관광 목적이 큰 여행이어서 국립공주박물관과 공산성에 들렀음에도 불구하고 자료를 쌓아놓지 못했다. 이것이 아쉬웠던 중 이 사극 프로젝트를 본격적으로 설계하던 2013년 6월의 한 주말에 홀로 훌쩍 떠나 송산리와 수촌리 고분군을 포함하여 당일치기로 꽉 짜인 일정의 답사를 진행하였다.
공산성. 지금의 성벽은 조선시대에 개축된 것이다.(2013. 6)
백제는 망했으나 망하지 않았다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83세의 노령에도 직접 3만 병력을 이끌고 백제의 수도 한성을 화공으로 공격하여 함락시킨 뒤, 개로왕과 왕족들을 잡아 처형한다. 이는 371년 백제 근초고왕이 평양성에서 고구려 고국원왕을 전사시킨 이후 이어지던, 같은 피를 나누어가진 백제와 고구려의 골육상쟁이 낳은 대사건 중의 하나이다. 또 직접적인 전쟁 원인으로는 472년 개로왕이 남북조 시대 북중국의 패자인 타브가치(탁발선비, 拓拔鮮卑-이들은 혈통, 언어적으로 고구려, 백제와 유사하다고 전해진다)족의 왕조인 북위(北魏)에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국서를 보낸 일이 거론된다. (이 사건이 낳은 파장에 대해서는 아차산 답사 및 국외 답사에서 자세히 논할 것이다. 백제는 북위의 실권자인 풍태후(馮太后)가 장수왕과 개인적인 원한 관계인 것에 희망을 걸었지만, 풍태후는 국내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위해 오히려 고구려와 친선 관계를 맺으며 개로왕의 요청을 거절했고 국서의 답장을 가진 북위 사신이 고구려에 발이 묶이는 일이 발생하여 내용을 안 장수왕은 개로왕의 처신에 대노하게 된다.(서영교 2004))
수도가 함락되고 왕과 왕족은 처형을 면치 못했지만,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고 장수왕은 더 이상의 진격을 명하지 않았다. 장수왕은 물론이고 그의 아버지 광개토태왕도 백제-가야-왜의 연합군을 세 번이나 대파하고 한반도 중남부를 휩쓸었음에도 백제는 멸망하지 않았었다. 이렇게 된 이유는 장수왕이나 광개토태왕이 처한 상황이 로마를 침공한 한니발의 그것과 다르지 않았던 것일 가능성이 크다. 즉 백제는 중앙집권국가보다는 연맹 왕국의 특성을 더 크게 가지고 있었고, 각지의 소국들은 꽤 독립적이며 다만 외교권과 군사 소집권을 가진 연맹의 수장으로서 백제왕(진왕 辰王; 김상 2011)이 존재했던 것 같다. 3세기의 기록인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는 한반도 중남부에 무려 78개국의 소국들이 기록되어 있다. 심지어 백제국(伯濟國), 사로국(斯盧國, 신라)도 명단에 소국들 중의 하나로서 이름을 올리고 있다. 즉 수도의 함락이 전국의 석권을 의미하지 않는다. 이는 가야와 왜의 경우에도 크게 다르지 않으나, 이들이 한 번 외부 세력과 전쟁이 있을 때의 단결력과 군사 동원력은 꽤 강력했던 것으로 보인다.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배울 때부터 든 생각이지만 우리나라 국사학계에서는 연맹국가보다 중앙집권국가가 우월하며 전자에서 후자로 발전한다는 믿음이 굳건한 듯하나, 실상은 매우 다르지 않았을까.
왜 웅진이었는가
서설이 길었다. 475년 장수왕이 더 진격하지 않은 것은 장수왕에게나 백제에게나 다행한 일이었다. 고구려군이 더 내려온다면 수많은 소국들과의 진흙탕 싸움에 직면했을 것이고, 백제로서도 언제 끝날지 모를 전쟁에 운명을 걸어야 했기 때문이다. 한성에서 남쪽으로 내려오는 대규모의 피난민이 발생했고, 이들을 아우르고 백제 왕실을 회복한 것은 신라에서 1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온 문주(文周)였다. 웅진성에 수도를 정하고 곧 왕위에 오른 문주왕의 출신에 대해서는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대체로 학계에서는 남조 송에 보낸 개로왕의 백제 국서에서 보이는 여도(扶餘都)를 문주라고 보나 분명한 근거는 없다. 또 당시 신라의 국세로 보아 전 병력을 동원했다고 해도 좋을 1만 군사를 흔쾌히 타국인 백제를 위해 내주려면 문주의 지위는 신라 왕족에 준할 정도가 되지 않으면 안 된다. 물론 4세기 말에만 해도 고구려의 신하를 자처하며 구원군을 요청하던 신라는 5세기 중반이 되면 고구려에 적대하게 되고 백제와 혼인 동맹을 맺는다. 문주는 개로왕의 태자라기보다는 신라의 왕족과 혼인 또는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던 왕족 또는 유력 가문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특히 일본서기에서의 문주왕의 이름인 모도(牟都)를 근거로 문주왕이 ‘신라 왕족’일 가능성까지 거론되기도 한다(모(牟)씨는 흉노 출신 성골 김씨의 원 성씨로 추측되기도 한다; 김상 2011). 또 왜와 백제에 이름이 드높은, 개로왕의 동생(또는 아들?; 김운회 2010)이며 동성왕의 아버지인 좌현왕 곤지(昆支: 부여곤 扶餘昆)의 존재도 문주왕의 정통성에 의심을 던지게 한다.
왜 웅진이 매우 짧은 시간에도 바로 수도로 결정되었을까? 많은 연구자들은 웅진성이 군사 요새로서 적합한 위치에 있고 수도로 결정될 당시 이미 일정한 도시 기능을 수행하고 있었다고 지적한다(심정보, 2003). 더 급진적인 견해는 웅진성이 마한 시절부터 유력 소국의 근거지로서 한성에 도읍한 한성백제와 별도로 비류백제의 수도 역할을 수행했다는 것이다(김성호 1984; 김상 2004; 김상 2011). 삼국사기에서 문주왕 2년에 궁실을 신축하는 것이 아닌 중수(重修)했다는 기록이 이들 견해의 근거로 제시된다.
수도로 이미 결정되어 국가의 중심 세력이 자리를 잡은 이상 어느 정도 기간은 다시 옮기는 것이 쉽지 않다. 이를테면 서울이 다시 수도가 된 지 600년이 넘으니 ‘관습헌법’으로까지 일컬어지게 되는 것이다. 사족을 달자면 웅진성이 있는 공주시에서 20킬로미터만 동쪽으로 가면 박정희 전대통령의 수도 이전예정지가 나오고, 그 바로 동쪽 금강 강변이 ‘신행정수도’ 세종시이다. 예나 지금이나 충남 중부 금강변이 요지(要地)임에는 틀림없어 보이지만, 대한민국 행정수도와 달리 문주왕은 ‘관습헌법’을 충실히 따랐을 가능성이 크다. 비류백제설을 따르자면, 한성백제가 피난하여 비류백제 또는 마한과 명실공히 한 몸이 된 것이다.
행정수도 예정지와 세종시 위치를 비교한 지도. 지도 좌측 끝 강변에는
공산성이 있다. (충북일보, 2013. 2. 26)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다’
웅진성(공산성)을 처음 둘러보게 되면 그 위용에 실망하게 된다. 백강(白江)이라고도 불리는 금강이 훤히 바라보이는 아담한 동산의 둘레를 연결한 전형적인 삼국시대 산성인 공산성은 과연 군사요충지일 수 있겠다는 생각이 절로 들지만, 이전과 이후 일반적인 산성들에 비해서도 그리 큰 규모가 아니다. 특히 ‘왕궁 추정지’라고 하는 구릉지에 가게 되면 ‘이렇게 작을 리가’라는 의심부터 들게 된다. 고려, 조선의 궁궐은 차치하고서라도, 경쟁국인 고구려 평양성의 궁궐 대전이 당(唐)의 황궁 대전과 비교하더라도 더 넓다는 점을 생각하면 실소마저 나온다. 물론 왕궁 추정지에 대하여 공산성 내부가 아니라 세 번째 수도 사비성(부여)의 경우와 같이 산성 아래 고을이 위치한 현 공주시내 평지에 있었다는 설이 있기는 하나, 증거 유적이 발굴된 바는 없다. 이렇게 ‘웅장하고 화려한 궁성과 주작대로’로 대표되는 동아시아 궁성의 모습에 대한 상식을 뒤집는 공산성의 왕궁지를 보고 수긍하게 하는 ‘건축이론’은 <삼국사기> 기록의 온조왕의 궁궐 묘사에서 찾아볼 수 있다.
儉而不陋 華而不侈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다.
- <삼국사기> 백제본기 온조왕 15년조
왕의 권위나 국가의 영토 넓이와는 관계없는 ‘소박한’ 궁궐이라는 의미인데, ‘백성의 눈높이’에 맞추어 검박한 왕실 전통을 꾸려가는 ‘자비로운’ 모습이 보이기까지 한다. <노자>에서 묘사하는 이상국가의 한 모습을 보는 듯한 소박한 궁궐 풍경은 <일본서기>에서 추존하는 5세기 초 ‘인덕천황’의 궁궐 묘사에서도 나온다.
...궁의 대궐과 담장에 흰칠을 하지 않았다. 제목에 장식을 달지 않았다. 갈대로 지붕을 할 때에도 끝을 가지런히 하지 않았다.
- <일본서기> 인덕천황 1년조
공산성 왕궁 추정지의 건물지. (2013. 6)
이러한 궁궐 모습은 백제가 중앙집권국가보다는 연맹왕국적 특성을 크게 가지고 있다는 점을 간접적으로 알려준다. 수도라는 곳의 모습이 이러하니 수십 개에 이르는 소국들의 모습 또한 웅진성보다 더 크거나 화려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5세기 이전 백제, 가야, 또는 왜 지역의 고대 유적들을 보면 대부분의 소국들이 왕족과 귀족들의 고분을 높게 조성할망정 방어용 산성을 제외하고 성벽을 높이 쌓거나 궁궐을 크게 짓지는 않았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대외 전쟁의 원활한 수행과 자원 축적을 위해 이렇게 ‘평등’한 소국 들 간의 연맹 관계를 강제로 위계적 관계로 바꾸려고 하는 백제왕(대왕, 혹은 진왕?)은 필연적으로 소국들의 원망과 저항을 받으며 ‘폭군’의 오명을 쓰게 된다(김상 2011). 한성 시대의 진사왕과 개로왕, 그리고 다음 답사 편에서 언급할, 웅진성에 화려한 누각인 임류각을 지은 동성왕의 경우가 그러하다. 연맹왕국 백제의 실상은 <노자>보다는 중세 유럽이나 일본, 후기 신라나 건국 초기 고려에 가까웠던 것이다.
정지산 제사 유적에서 바라본 웅진성. 동산 주위를 두른 성벽이 보인다. (2013.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