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답사

한강의 백제 <3> - 하남 이성산성/궁안마을/하남역사박물관/도미나루

이름없는 꿈 2014. 3. 22. 14:53

이성산성: 유물의 배신
역사적 사건이나 그 지리적 위치를 확정할 때에는 역사학적 추리에 근거한 ‘설’과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맞춰볼 필요가 있다. 캐낼수록 ‘고조선’ 중심지의 가능성을 점점 짙게 풍기는 내몽골 적봉(赤峰)의 ‘요하(遼河)문명’ 유적과 같이, 뜻하지 않은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먼저 있고 이러저러한 역사적 가설을 맞추어가야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설’이 먼저 존재하고 고고학적 증거를 찾아내야 하는 경우가 있는데, ‘한성 하남(河南)설’은 후자에 속한다. 현재의 서울 송파구, 강동구, 경기도 하남시, 광주(廣州)시는 예전에는 모두 ‘광주군’에 속하였으므로 ‘한성 광주설’이라고 할 수 있지만 송파구에 있는 풍납토성과 몽촌토성도 옛 ‘광주’에 속하기 때문에 구별을 위해 ‘한성 하남설’이라고 부르겠다. 이 설은 조선 후기 다산 정약용, 대동여지도 제작자 김정호는 물론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라는 떠받듦과 ‘일제 식민사학의 추종자’라는 욕을 동시에 듣는 이병도까지 현재의 하남시 교산동․춘궁동 일대를 백제 수도 한성으로 비정했기 때문에 한때 매우 유력한 학설이었다.    

 

필자는 아직까지 많은 지지자들을 확보하고 있는 ‘한성 하남설’을 접하고 2013년 4월 하남시의 중요 유적들을 돌아보게 되었다. 이성산성(二聖山城)은 높이 209m의 이성산을 둘러싼 둘레 1.9km, 성벽 높이 4~5m의 비교적 큰 산성인데 교산동․춘궁동에 왕궁이 있었다면 이를 방어하는 산성으로서 알맞은 위치에 있다.

 

 

                                                                            이성산성 성벽 일부 (2013. 4)

 

 

                                                                  하남역사박물관의 이성산성 복원모형 (2013. 4)

 

이성산성은 일군의 사학자와 그 지지자들의 계속된 요구로 1986년부터 10차례나 되는 발굴이 이루어졌지만, 지금까지의 발굴 성과는 이들의 기대를 완벽하게 배반하고 말았다고 한다(조유전 2008). 백제의 성임을 확신하고 발굴했는데 쏟아져 나온 것은 한결같이 6~7세기 신라 유물이었다는 것이다. 신라성이라는 설이 힘을 얻어 가던 중 오히려 고구려 관직명이 적힌 목간까지 발견되어 고구려 산성이라는 설까지 제기되었다고 한다. 2001년 9차 발굴 때에는 ‘일부 백제 유물이 발견되었는데도 무시되었다’며 ‘백제성 설’을 주장하는 사학자들과 지지자들이 강력 반발하는 일도 있었고, 이후 2007년 추가 발굴 조사를 진행하였음에도 백제 유물 등은 발견되지 않았다고 한다(조유전 2008). 필자가 가보았을 때에도 이성산성은 신라 성으로 설명되어 있었다. 적어도 신라 진흥왕(재위 540~576) 시대에 한강 유역을 차지(554)한 이후에 쌓은 성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궁안마을과 그 주변: 유적의 배신  
하남시 교산동․춘궁동 일대의 중심인 궁안마을은 현재는 중부고속도로와 서울외곽순환고속도로 분기점 남쪽으로 두 도로에 둘러싸인 지점인데 조선 초기 광주읍 중심지라 하여 고골(古邑)이라고도 불린다.

 

 

                                                                  하남시 춘궁동 일대. 태그된 곳은 '광주향교'로

                                                                   궁안마을이 있는 곳이다. (네이버 지도 캡쳐)

 

‘광주향교’ 옆에 있는 궁안마을 안내판을 보면 백제 도읍지의 왕궁이 있었기 때문에 ‘궁안’(宮內)이라고 불린다는 설명이 있다.

 

 

                                                                            궁안마을 표지석 (2013. 4)

 

그러나 궁안마을의 전승(傳承) 왕궁터 역시 향토사학자들의 줄기찬 요구에 따라 발굴한 결과 역시 통일신라 후기~조선 후기의 건물터로 밝혀졌다고 한다(조유전 2008). 결과적으로 ‘한성 하남설’은 정황적으로나마 뒷받침할 만한 증거를 거의 찾지 못한 셈으로, 지금까지는 풍납토성-몽촌토성 설이 가장 옳다는 잠정적인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일본 나라, 아스카 지역에서 거대한 규모로 발견되는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 하남시에서도 큰 규모로 발견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는데, 최근의 발굴 조사 결과 이는 고분이 아니라 평범한 동산이며, 오히려 청동기 취락 유적이 발굴된다고 한다.

 

경기 하남지역 재야사학자들이 2005년 일본열도 고분시대에 집중 확인되는 독특한 무덤 양식인 전방후원분(前方後圓墳)이라고 주장한 야산은 발굴조사 결과 신석기 이래 조선시대에 이르기까지 집과 무덤으로 사용한 '민둥산'으로 밝혀짐으로써 근거없는 낭설로 드러났다.
매장문화재 전문조사기관인 한백문화재연구원(원장 서영일)은 하남 미사보금자리 주택단지 조성지구에 있는 1-1지점(하남고 뒤편) 야산 일대와 3지점을 발굴조사한 결과 이 야산에서 신석기·청동기시대 생활 유적과 조선시대 분묘 유적을 확인했다고 23일 말했다.
(중략)
 2005년 이후 재야사학계 일각에서는 이 야산은 단순한 산이 아니라 한성도읍기 백제가 조성한 거대한 왕릉이며, 봉분은 둥글고 그 앞에다가 사각형 단을 마련한 전방후원분이라는 주장을 끊임없이 제기했다.
나아가 이번 조사 결과 3지점 시굴조사에서는 조사지역 북쪽 중앙부에서 몸돌과 격지 등의 구석기 유물이 출토됐다.
조사단은 "이번 조사 결과 구석기와 신석기·청동기시대, 그리고 초기철기시대 유적이 확인됨으로써 하남 일대 한강 유역의 역사성과 문화상에 새로운 자료를 확보하게 됐다"면서 "나아가 야산에서 시대를 고루 망라하는 각종 유적을 확인함으로써 이른바 하남 전방후원분 진위 논란은 끝날 것으로 본다"고 말했다.
                                                                                                                                                      - <연합뉴스> (2013. 10. 23)

 

이와 같이 ‘한성 하남설’을 증명할 것만 같았던 증거들의 잇따른 ‘배신’은 일군의 사학자들의 ‘멘붕’은 물론 ‘백제 수도’로 브랜드화하려던 하남시와 시민들의 노력에 계속 찬물을 끼얹고 있고, 지자체 간 브랜드 경쟁의 승자는 서울시가 되어가는 듯하다.

 


광암동 고분군, 하남역사박물관, 검단산과 도미나루
하남시에 백제 관련 유적이 없는 것은 아니다. 대표적인 유적으로 2005년 이성산성 서남쪽 도로변에서 발견된 광암동 고분유적이 있다.

 

세종대박물관(관장 하문식)은 경기 하남 덕풍-감북간 도로확포장구간에 포함된 하남시 광암동 산 21번지 일원을 발굴 조사한 결과 한성시대 백제 횡혈식 석실분 2기와 신라시대 석곽묘 11기를 비롯한 공동묘지 구역을 찾아냈다고 22일 말했다.
조사 결과 두 석실분은 모두 무덤방 남쪽 벽면 중에서도 동쪽으로 치우친 곳으로 연결되는 연도(무덤방으로 통하는 길)를 별도로 마련한 횡혈식(橫穴式)이었다.
또, 바닥은 긴 네모꼴인 장방형(長方形)으로 드러났다. 무덤방은 북동-남서쪽을 긴 축으로 삼아 배치돼 있었다.(하략)

                                                                                                                                                       - <연합뉴스> (2005. 9. 22)

 

 

                                                                       광암동 백제 고분의 1호분 (2013. 4)

 

하지만 백제 석실분 2기 만으로는 백제 왕성임을 증명하기에 갈 길이 멀 듯 하다. 또 답사 때 관람한 하남역사박물관에서는 미사리에서 발견된 한성백제 시기 주거지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고 있었다.

 

 

                                                         하남역사박물관의 미사리 주거지 유적 설명 (2013. 4)

 

춘궁동의 동쪽 강변쪽에는 검단산(657m)이 있는데 일부에서는 부여의 시조를 모신 동명묘(東明廟)가 있었으며 백제왕이 제사를 지내던 숭산(崇山)일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런데 검단산의 위치는 춘궁동 일대는 물론 풍납토성-몽촌토성에서도 거의 정동(正東) 방향에 위치해 있어서 오히려 풍납-몽촌토성의 왕성 가능성을 더 높여주는 설이 아닐까 한다.

 

 

                                         태그된 곳이 검단산이다. 몽촌토성(올림픽공원)-춘궁동(하남JC 남쪽)-검단산이

                                                                일직선으로 이어져 있다. (네이버 지도 캡쳐)

 

 

                                                                                하남 검단산 (2013. 4)

 

1980년대부터 한성 하남설을 주창해왔던 오순제(2005) 등은 하남시와 서울 송파구, 강동구, 강남구 일대의 산성과 토성 등 구전(口傳) 유적 등의 보존과 발굴 촉구 등을 통해 하남 춘궁동을 중심으로 한성 도성의 범위를 매우 크게 잡고 ‘도성 방어체계’(오순제 2008)와 백제의 ‘이념체계’에 따른 도성 시설의 배치 등 광범위한 이론을 전개한 바 있다. 이들의 노력은 부족한 백제 역사 사료의 보충과 보존 및 이론 성립에 대한 경각심과 주의를 일깨워 온 것은 사실이다. 또 하남시와 서울시 등 지자체의 부주의한 문화재 관리와 개발사업에 의한 파괴를 비판하여 개선시키는 역할을 한 것으로도 알려져 있다.

 

 

                                                    백제계 성이었을 듯한 강남 한복판의 삼성동 토성은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표석만 만들어놓았다. 보존을 무시한 대표적인 예로,

                                                       ‘강남스타일’에 이르기까지에는 그 대가가 상당했던 듯하다.

                                                                           (<서울신문>, 2013. 5. 29.)

 

그런데 필자의 개인적인 느낌으로는 한성 하남설에서 백제를 중앙집권적인 전제 국가로 판단하고 대규모의 왕성 체계를 갖췄다는 가정에 오류가 있지 않은가 하며, 이 때문에 고고학적 발굴 성과가 ‘설’과 거리가 멀어져버린 듯하다. 공주의 유적이나 나중에 답사 포스팅에서 살펴볼 영산강 유역에서도 보듯이 사비 천도(538) 이전의 백제와 삼한 유적들에서는 대규모의 궁성은 찾아보기 힘들며 ‘검소하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하지 않다’(儉而不陋 華而不侈)는 백제 초기 기록의 ‘건축이론’을 떠올릴 수 있다.

 

검단산에서 북쪽으로 내려온 한강 기슭에는 ‘도미나루’라는 곳이 있는데 하남시에서 ‘위례역사길’과 ‘위례사랑길’이라는 도보 코스를 개발하면서 조성한 곳으로 ‘도미부인’이 고구려로 가기 위해 배를 탄 나루터라고 한다. 서울 강동구의 ‘도미부인 동상’과 브랜드 경쟁 목적이 있었던듯한데 나름 근거는 있다고 한다. 필자는 ‘도미부인’ 이야기의 사실성 여부에는 물음표를 다는 입장인데, 본 기획 열전 포스팅의 무령왕 어머니 편에서 상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도미나루' 입구 (2013. 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