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東城王, 말다(末多) 또는 모대(牟大), ? ~ 501, 재위 479~501):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24대 왕. 왜국 웅략왕과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큰 곤지(昆支)의 아들로 <일본서기>에는 ‘말다’, <삼국사기>와 <남제서>에는 ‘모대’라는 이름을 가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왜국에 오래 체류하다가 즉위(479년)할 때 귀국하였는데 축자국(筑紫國: 보통 규슈(九州) 지역으로 추정한다)에서 온 5백의 군사가 호위했다고 한다(<일본서기>). 동성왕은 출생 연도가 밝혀지지 않아 무령왕 사마와의 관계로부터 추정하는데 즉위 시 나이에 대하여 10대 중반에서 30대 중반까지 다양한 설이 있다. <일본서기>에는 ‘총명하다’, <삼국사기>에는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발백중이었다’고 기록되어 있어 문무(文武)에 출중하였던 듯하다. 그의 치적에 대하여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의 전쟁과 이를 위한 신라와의 동맹 등 한반도에서의 상황이, <남제서(南齊書)>에는 왕후(王侯: 제후) 등의 임명과 북위와의 전쟁이 기록되어 있다. 이 중 전자는 동성왕 자신이, 후자는 백제의 이름을 가지고 서남해상의 교역과 상업을 주도하는 제(諸) 세력이 실행했다고 생각된다. 대외적인 전공(戰功)으로 백제의 부활을 알렸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왕은 말년의 지나친 왕권 강화책으로 ‘백가의 난’을 초래하게 된다.
‘왜왕 무(武)’의 국서와 대륙백제
興死,弟武立,自稱 使持節、都督倭百濟新羅任那加羅秦韓慕韓七國諸軍事、安東大將軍、倭國王。
(왜왕) 흥이 죽고 그의 아우 무(武)가 위를 이으니 스스로 칭하기를 사지절도독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 진한, 모한 7국제군사 안동대장군 왜국왕이라고 하였다.
- <송서> 왜국전, 순제 2년(477)조
477년 11월, 대장군 소도성(蕭道成)이 실권을 장악하고 있는 유송(劉宋)의 건강성(建康城)에 ‘왜왕 무’의 사신이 당도한다. 남조의 황제들로부터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이라는 관작을 받아왔던 이전의 왜왕들(찬(讃), 진(珍), 제(濟), 흥(興))과는 달리 왜왕 무는 관할 지역에 ‘백제’를 추가하여 ‘7국제군사’를 자칭하고 있다. 게다가 이 사신을 통해 본 열전 포스팅의 ‘개로왕과 곤지(4)’에서 소개했던 장문의 국서를 보내고 있는데 고구려에게 ‘아버지와 형’을 잃은 슬픔과 분노를 표현하며 복수를 다짐하기도 한다. 이는 일본 학계에서도 왜왕 무로 비정하고 있는 웅략왕이 곤지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을 높게 한다(김운회 2010). 또 ‘백제’에 대한 관할을 추가로 주장하는 것은 곤지가 백제 왕통을 계승할 정통성을 주장하는 것과 동시에 내전이 예상되는 상황에서 자신의 세력을 국제적으로 인정받게 하고자 하는 의도를 담은 것일 수 있다. 다만 국서의 전달 시기가 477년 7월 곤지의 사망 이후라는 점에서 이 국서가 웅략왕의 ‘유서’ 성격을 띠고 있지 않을까 생각된다.
일각에서는 477~478년의 이 왜국 사신과 국서에 대하여 웅략왕의 부재 속에서 그의 권위를 빌려 정권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려던 왜국 지도층(귀국 이전의 동성왕?)이 보낸 것이라는 설(김상 2004)과 심지어 당시 15세의 무령왕 사마가 보낸 것(해당 주제의 소설까지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이라는 설이 주장되기도 한다. 필자의 생각으로는 이 사신을 동성왕이 보냈든지 무령왕이 보냈든지 간에 ‘국서’ 자체는 그들의 독자적 ‘작품’이라기보다는 웅진 입성 이전 남부의 소국에 머무르던 곤지가 작성한 ‘유서’이자 ‘유훈외교’의 지침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당시 어린 사마는 자신이 국서를 작성하거나 사신을 보냈다기보다는 전달자로서 사신 일행에 포함되어 건강성을 방문하는 정도의 역할을 수행했을 듯하다.
사실 사신을 맞이하는 유송의 황제와 소도성의 입장에서 백제의 사신과 왜의 사신을 얼마나 구분할 수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백제인’ 곤지는 ‘왜왕’으로서 사신을 보낼 자격이 있었을 것이며, 게다가 476년의 백제 사신은 바닷길에서 고구려에 막혀 실패했다(<삼국사기> 문주왕 2년조). 백제나 왜는 문주왕-해구와 곤지의 세력이 갈린 당시 정세상 외교적 경쟁을 할지언정 ‘두 얼굴의 부여’로서 서로 크게 다른 나라라는 인식은 하지 않았다고 생각된다(김운회 2010). 백제 사신과 달리 왜국 사신이 건강성에 당도할 수 있었던 것은 ‘대륙백제’의 도움이 컸을 듯한데, 필자의 사극에서는 몇몇 설정 인물(특히 여성)과 사서에 등장하는 ‘대륙백제’ 인물들 중 몇몇이 바다를 건너오는데 성공한 사마 일행과 함께 왜국 사신 프로젝트를 모의하고 실행하는 것으로 묘사될 것이다.
그런데 유송의 실권자 소도성은 왜왕 무의 ‘7국제군사’ 요청에 대하여 ‘백제’를 뺀 ‘6국’만을 인정하여 과거와 같은 ‘6국제군사 안동대장군’의 관작만을 내리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일반적으로 백제왕이 ‘안동대장군’보다 한 단계 높은 ‘진동대장군(鎭東大將軍)’으로 관작을 받아왔는데 왜왕의 관할지역에 백제를 포함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으로 해석된다(479년 소도성은 자신이 남제의 황제로 즉위하면서 왜왕 무의 관작을 ‘진동대장군’으로 높이게 된다). 이로써 왜국 사신 프로젝트는 ‘절반의 성공’만을 거둔 셈인데, 이제 곤지의 후계자들이 ‘7국’을 아우르려면 백제의 진왕(辰王: 대왕)위에 오르는 것이 필수적 조건이 된 것이다. 이후 백제 왕위를 둘러싼 모대와 진씨 세력의 협상에서는 이 내용 역시 포함되었을 것이며, 479년 모대가 백제왕이 되면서 ‘두 얼굴의 부여’는 비로소 ‘한 얼굴’과 마찬가지가 되며 ‘7국’ 문제가 해결되게 된다. 또 이후 502년 남조의 왕조가 ‘양(梁)’으로 바뀌면서 왜왕 무가 정동대장군(征東大將軍)으로 승격하는 것을 끝으로 7세기 초까지 중원 왕조와 왜국의 외교 기록이 끊긴다.
고구려의 외교적·군사적 공세와 동성왕의 대응
479년 유연(柔然)과 지두우 분할을 모의하던 고구려는 480년 이후 남제에까지 손길을 뻗치게 된다. 다음의 기록들을 보자.
六十八年 夏四月 南齊太祖蕭道成 策王爲驃騎大將軍 王遣使餘奴等 朝聘南齊 魏光州人 於海中得餘奴等 送闕 魏高祖詔責王曰...
68년 여름 4월, 남제(南齊)의 태조(太祖) 소도성(蕭道成)이 임금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책봉하였다. 임금은 남제에 사신 여노(餘奴) 등을 보내 예방하게 하였는데, 위나라의 광주(光州) 사람이 바다에서 여노 등을 붙잡아 위나라 궁궐로 압송하였다. 위나라의 고조(高祖)가 임금에게 조서를 보내 다음과 같이 책망하였다...(후략)
-<삼국사기> 장수왕 68년(480)조
六十九年 遣使南齊朝貢
69년, 남제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삼국사기> 장수왕 69년(481)조
七十二年 冬十月 遣使入魏朝貢 時 魏人謂我方强 置諸國使邸 齊使第一 我使者次之
72년 겨울 10월, 위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였다. 이때 위나라의 사람들은 우리나라가 이제 강성하다고 생각하여, 여러 나라 사신들의 숙소를 배치할 때 제(齊) 나라의 사신을 첫 번째, 우리나라의 사신을 두 번째에 두었다.
-<삼국사기> 장수왕 72년(484)조
480년 남제 황제 소도성이 먼저 고구려 장수왕을 승인하고 장수왕이 답례 사신을 보내고 있다. 북위의 해적(?)이 이 사신을 붙잡아 압송하였는데 효문제(라고 쓰고 풍태후라고 읽는다)는 다만 책망할 뿐 어떤 강경한 조치를 취하지도 못한다. 게다가 고구려는 다음 해에 보란 듯이 다시 남제에 사신을 보내고 있다. 또 그럼에도 (484년) 북위에 보낸 사신이 꾸짖음을 당하기는커녕 극진한 대우를 받고 있다. 고구려가 유연, 북위, 남제에 모두 손을 뻗쳐 ‘조종’하고 있는 셈인데, 백제의 입장에서는 대단한 압박이 된다. 또 482년 북위의 실권자 풍태후는 고구려와의 국혼을 기어코 성사시키는데 효문제의 후궁이 된 문소황태후(文昭皇太后)이며, 그의 아들이 효문제의 뒤를 이은 선무제(宣武帝, 재위 499~515) 원각(元恪)이다. 풍태후가 북위 왕실을 개인적으로는 ‘가문의 원수’이기까지 한 장수왕의 혈통과 끈질기게 엮으려 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이와 같이 동성왕 초기에도 백제는 고구려에 외교적으로 수세에 몰리게 되는데, 한반도에서는 군사적으로도 침공을 당한다.
四年 春正月 拜眞老爲兵官佐平 兼知內外兵馬事 秋九月 靺鞨襲破漢山城 虜三百餘戶以歸
4년 봄 정월, 진로(眞老)를 병관좌평으로 삼고 겸하여 서울과 지방의 병마에 관한 일을 맡게 하였다.가을 9월, 말갈이 한산성을 습격하여 부수고 3백여 호를 사로잡아 돌아갔다.
- <삼국사기> 동성왕 4년(482)조
이후 동성왕은 침공을 당한 한산성(위치 미상)을 정비하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며 수세적 상황을 바꾸려 애쓰게 된다.
五年 春 王以獵出至漢山城 撫問軍民 浹旬乃還
5년 봄, 임금이 사냥하기 위하여 한산성에 이르러 병사와 백성들을 위로하고 열흘 만에 돌아왔다.
- <삼국사기> 동성왕 5년(483)조
六年 春二月 王聞南齊祖道成 冊高句麗巨璉 爲驃騎大將軍 遣使上表 請內屬 許之
6년(서기 484) 봄 2월, 남제(南齊) 태조 소도성(蕭道成)이 고구려왕 거련(巨璉, 장수왕)을 표기대장군(驃騎大將軍)으로 책봉하였다는 말을 임금이 듣고, 남제에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리고 내속을 청하니 태조가 허락하였다.
- <삼국사기> 동성왕 6년(484)조
고대 제왕의 ‘사냥’은 군사훈련의 속성을 띠고 있는데 동성왕의 사냥 또한 그러한 듯하다. 또 476년의 사신과는 달리 484년의 사신은 건강성에 당도하여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게 된 것인데 ‘왜왕 무’의 사신처럼 대륙백제 세력의 도움이 컸다고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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