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진왕제(辰王制) 가설 살펴보기 <1> - 80개의 소국과 삼한, 백제(伯濟)와 백제(百濟)

이름없는 꿈 2014. 11. 19. 23:46

신라권 소국 유적에서 발굴된 백제식 관모

 

성림문화재연구원은 30일 "의성군 의뢰를 받아 금동제 관모를 비롯한 약 1000여 점에 이르는 유물을 수습했다"고 밝혔다.
이번에 발굴된 의성 금동관모는 장식용 모자의 일종으로서 5세기 후반 무렵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경주를 제외한 신라 권역에서는 처음 발견된 유물로 역사적 가치가 높은 것으로 평가된다. 이번에 발굴된 의성 금동관모는 장식용 모자의 일종으로 추정된다. 백제시대 관모 특징인 기다란 봉이 사용된 점으로 미뤄 당시 의성 지역과 백제가 교류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박광열 연구원장은 "단위 유적 발굴에서 관모와 관식이 다량 출토되기는 매우 드문일"이라며 "조문국 후예인 금성산 고분군을 중심으로 한 의성 지역 정치체가 신라 중앙과의 관계에서도 독자적 정치체로 존재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라고 설명했다
... (후략)

 

                                                 

 

                                                              - “의성 금동관모 출토, 경북 지역서 백제 문화가? '학계 관심 고조'“ <SBS CNBC>, 2014. 10. 30.

 

 

조문국(召文國, 소문국(召文國)으로 불려야 한다는 설도 있음)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벌휴 이사금 2년(185) 조 신라에 의한 정벌 기록에서 확인되는 소국이다. 2세기 말에는 ‘사로국’으로 불렸을 신라가 조문국을 복속시켰다는 것인데, 5세기 후반의 고분 유적에서도 조문국의 독자성이 나타나는 동시에 심지어 백제계인 유물이 발굴되고 있다. ‘기다란 봉이 달린 관모’는 백제계 대형 고분의 대표적인 유물로 5~6세기에 이르면 한반도 내 백제권 최남단인 영산강 유역에서도 발견된다. 보통은 환두대도(環頭大刀) 등과 함께 지방 세력가에게 백제 중앙에서 내리는 위세품(威勢品)으로 해석되기도 한다.

 

신라가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한 것은 6세기 법흥왕 시대라는 것이 통설이므로, 5세기 후반의 조문국에 그 독자성이 나타나는 것은 이상할 것이 없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단순히 백제권과의 ‘교류’만으로 나타나기 힘든 유물이 발견되었기 때문에 화제가 될 수 있는 것이다.

 


3세기의 중국인이 본 한반도: 80개의 소국들

중국의 정사(正史) 24사 중의 하나인 <삼국지> 위지(魏誌) 동이전(東夷傳, 본래 烏丸鮮卑東夷傳)은 2~3세기 만주와 한반도를 기술하고 있기 때문에 삼국시대와 그 이전 고대사를 이해하는 데 가장 중요시되는 사료 중의 하나이다. 그 유명한 ‘음주·가무의 민족’ 류의 표현이 나타나는 역사서이기도 하다. 현재의 국사 교과서에 실려 있는 ‘삼한’에 대한 내용은 대부분 여기에 담겨 있다.

 

<韓>在<帶方>之南, 東西以海爲限, 南與<倭>接, 方可四千里. 有三種, 一曰<馬韓>, 二曰<辰韓>, 三曰<弁韓>. <辰韓>者, 古之<辰國>也. <馬韓>在西. 其民土著, 種植, 知蠶桑, 作綿布. 各有長帥, 大者自名爲臣智, 其次爲邑借. 散在山海間, 無城郭. ,.. (중략, 55국 나열) ... 凡五十餘國. 大國萬餘家, 小國數千家, 總十餘萬戶. <辰王>治<月支國>. 臣智或加優呼臣雲遣支報安邪皺支掺臣離兒不例拘邪秦支廉之號. 其官有魏率善·邑君·歸義侯·中郞將·都尉·伯長.
한(韓)은 대방(帶方)의 남쪽에 있는데, 동쪽과 서쪽은 바다로 한계를 삼고, 남쪽은 倭와 접경하니, 면적이 사방 4천리 쯤 된다. [韓에는] 세 종족이 있으니, 하나는 마한, 둘째는 진한, 세째는 변한인데, 진한(辰韓)은 옛 진국(辰國)이다. 마한은 [삼한 중에서] 서쪽에 위치하였다. 그 백성은 흙집생활을 하고 곡식을 심으며 누에치기와 뽕나무 가꿀 줄을 알고 면포를 만들었다. [나라마다] 각각 장수가 있어서, 세력이 강대한 사람은 스스로 신지라 하고, 그 다음은 읍차라 하였다. [그 나라 사람들은] 산과 바다 사이에 흩어져 살았으며 城郭이 없었다. ... 모두 5십여국이 있다. 큰 나라는 만여 가(家)이고, 작은 나라는 수천 가로서 총 10여 만호(戶)이다. 진왕은 목지국 (月支國으로 표기되었으나 ‘목지국’(目支國)이 맞다고 한다)을 통치한다. 신지에게는 간혹 우대하는 호칭인 ‘신운견지보’, ‘안야숙지’, ‘분신리아불례’, ‘구야진지겸’ (모두 본래 칭호의 음차인 듯하다) 칭호를 더하기도 한다. 그들의 관직에는 ‘위솔선’, ‘읍군’, ‘귀의후’, ‘중랑장’, ‘도위’, ‘백장’이 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弁辰>亦十二國, 又有諸小別邑, 各有渠帥, 大者名臣智, 其次有險側, 次有樊濊, 次有殺奚, 次有邑借... (중략, 25국 나열) ...
변진(한)도 12국으로 되어 있다. 또 여러 작은 별읍(別邑)이 있어서 제각기 거수(渠帥)가 있다. [그 중에서] 세력이 큰 사람은 신지(臣智)라 하고, 그 다음에는 험측(險側)이 있고, 다음에는 번예(樊濊)가 있고, 다음에는 살해(殺奚)가 있고, 다음에는 읍차(邑借)가 있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

 

2~3세기를 기술한 사료 중 그 서술 시기가 가장 앞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묘사된 한반도 중남부에는 마한 54국, 진한 12국, 변한 12국, 그리고 ‘소속’이 분명치 않은 2국이 있었다. 이는 후대에 저술된 <삼국사기> 백제본기나 신라본기에는 기술되지 않은 내용이다. ‘식민사학’의 악영향까지 반영되어 역사학계에서 한때 일세를 풍미했던 <삼국사기> 초기 기록 부정론의 배경에는 이런 사정이 있었다. 하지만 마한 54국 중에 백제(伯濟)국, 진한 12국 중에 사로(斯盧, 신라의 옛 이름)국이 있다는 기록이 주목되면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을 ‘일부’ 긍정하여, 삼한의 소국들이 발전하여 세력 경쟁을 거쳐 백제와 신라로 통합되었다는 설이 고고학적 발굴 성과를 바탕으로 통설처럼 통용되고 있다. BC 1세기 후반에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부여-고구려의 일파에 의해 ‘십제(十濟)’로 시작한 소국인 온조의 백제가 2~3세기에는 <삼국지>에 백제(伯濟)라는 국명으로 나타나고 5~6세기에 이르기까지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을 병합하는 단계적 발전 과정을 거쳤다는 것이다(노중국 2013). 신라의 경우에도 사로국이 발전하여 위에서 기술한 ‘조문국’ 이외에도 7국을 병합하는 <삼국사기> 기록이 있어 단계적 발전론을 뒷받침하는 것으로 이야기되기도 한다. 다만 조문국과 7국의 국명은 <삼국지>의 진한 소국들의 국명들과는 다른데, 한문 기록의 특성상 원 국명의 음차에 차이가 있을 것이라는 점과 <삼국지>와 <삼국사기>의 집필 시기 차이를 고려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일개 소국이 그토록 매끄러운 발전 과정을 거친다는 것은 너무 비현실적인 추정일 수 있다(김운회 2010). 설사 백제와 사로국이라는 2개 소국이 오랜 세월 동안 한반도 중남부를 석권할 만큼 발전한 것이 사실이라고 가정하더라도, 이는 순차적인 발전 결과가 아니라 외부 세력의 유입, 승리와 패배, 연합과 분열, 홍수와 가뭄 등 수많은 변수를 겪고 세력의 확장과 부침을 거듭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치이다.

<삼국사기>는 유교적 서술 원칙과 사대주의적인 편향을 반영하여 서술되었다는 점에서 비판받기는 하지만, (<일본서기>가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왜국사를 완전히 개조한 것처럼) 고구려본기, 백제본기, 그리고 신라본기 초기 기록을 구태여 왜곡하거나 엉터리로 기술할 이유는 찾기 힘들기 때문에 이들 기록이 굳이 부정되거나 ‘일부’만 긍정되어야 하는지 의문이 아닐 수 없다. 이런 점에서 <삼국사기> 초기 기록 ‘전부 긍정론’이라고 할 수 있는 김상(2004; 2011)의 가설은 충분히 검토할 만한 가치가 있다고 본다. 

 


기록의 공백 메우기: ‘비류백제’와 ‘임나가야’

 

우리는 4세기 이전의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한강변의 아주 작은 지역만 나오고 한반도의 대부분 지역이 텅 빈 기록의 공백인 것을 보면서 다른 지역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한다. 금강 유역은 475년 웅진 천도가 첫 기록이고, 영산강 유역은 498년 동성왕의 무력시위가 첫 기록이다.
그러다 <삼국지> 동이전을 본다. 거기에는 무려 80국이 있다. 삼한이 78국이고 변진한 지역에 있었으나 삼한에 들어가지 않는 나라가 2국이다. <삼국사기>는 삼한 78국 중에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나라만 선택하여 백제본기로, 非韓 2국 중에 역시 마지막까지 살아남은 한 나라만 선택하여 신라본기로 기록을 남기고 나머지 모두를 삭제한 책이다. 그러니 4세기 이전 한반도 남부 전체가 거의 기록의 공백인 것이다.

 
                                                                                                                                      - <삼한사의 재조명2> (2011), 김상, p. 9

 

<삼국사기> 백제본기의 영역 공백 문제에 대한 김상(2004; 2011)의 추정은 그 결론부터 말하면 5세기 이전 <일본서기> 기록이 가리키는 ‘몸통’인 ‘비류백제 (진왕백제 또는 삼한백제)’와 신라를 괴롭히던 ‘임나가야’가 그 공백을 메우는 주체였다는 것이다. 이 결론에 이르는 논증과 근거는 이 글에서 일일이 기술할 수는 없으나 오직 원 사료들과 고고학적 성과를 바탕으로 탄탄하게 전개되고 있는데, ‘비전공자’의 핸디캡을 강조하여 ‘비판’보다도 앞서 ‘무시’하는 경향이 있는 기존 사학계에서도 정당하게 고려되어야 하는 이론이라고 본다.

 

5세기 이전 한반도에 대한 이러한 추정은 이미 선배 또는 스승 격의 ‘버전’을 가지고 있는데 김성호(1984)의 ‘비류백제설’이 그것이다. 그의 ‘해양백제’에 대한 추정(1994)과 마찬가지로 ‘비류백제설’도 학문적 논쟁이라고 할 만한 것이 없이 묻혔다는 느낌이 있고, 물론 ‘비전공자’에 대한 ‘무시’의 결과였을 가능성이 크다. 수많은 ‘재야 사학자’들의 ‘소설’ 중 하나에 불과해 생각할 가치가 없다는 (실제 그러한 ‘소설’ 중에 황당한 이야기들이 많은 것은 사실이다) 것이겠지만, 무슨 ‘진영 논리’마냥 싸잡아 무시되는 경향은 지양되어야 하지 않을까 한다. 김상의  ‘삼한백제설’은 곧 비류백제설의 강력한 업데이트라고 할 수 있는데 활발한 논쟁의 대상이 되기를 바란다.

 


진왕(辰王)

김상(2004; 2011)에 의하면 ‘비류백제’는 곧 ‘삼한백제’였으며 수많은 소국의 위계질서로 이루어져 있는데, 이들 소국의 지배자들 사이는 힘의 관계에 따라 다른 위상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며 맹주국에 존재하는 그 최상위의 지도자는 진왕(辰王)이라고 불렸다. 또 ‘백제왕(百濟王)’은 외교에 있어 진왕의 명칭에 해당되었다. 하지만 진왕은 통치 영역이나 권력 면에서 맹주국 자체의 범위를 넘지 못하였으며, 지방 소국들의 통치는 거의 독자적으로 이루어졌고 진왕위에 올라 그 자리를 유지하는 것(‘자립위왕(自立爲王)’)은 자력보다는 결혼을 통한 동맹관계를 가지는 강력한 소국(온조의 한성백제는 바로 이러한 강력한 ‘중소국’의 성격을 가진다)이나 실권자에 좌우되었다는 것이다. 또 어떤 소국이 강력하게 되면 맹주국에 힘을 보탤 수도 있겠지만 ‘연맹(또는 연방?)’에서 ‘탈퇴’하여 대항하거나 스스로 ‘맹주국’의 지위를 가지려고 했다고도 한다. 이런 체제는 <삼국지> 동이전에서와 같이 외부인의 눈으로 보았을 때에는 ‘80개의 소국’이 제각기 존재하여 올망졸망 경쟁과 협력을 거듭하는 파편화된 모습인 것이 당연하다. 다음 글에서는 ‘진왕제 가설’에서 논의되는 진왕제의 기원과 삼한백제, 그리고 온조백제(한성백제)의 역사를 정리해보도록 하겠다.

 

... <弁·辰韓>合二十四國, 大國四五千家, 小國六七百家, 總四五萬戶. 其十二國屬<辰王>. <辰王>常用<馬韓>人作之, 世世相繼. <辰王>不得自立爲王
변진한은 합하여 24국으로, 큰 나라는 4~5천호, 소국은 6~7백호이며, 총 4~5만 호 정도이다. (변진한의 각각) 그 12국은 진왕(辰王)에 속한다. 진왕은 항시 마한 사람으로 세우는데, 대대로 계승된다. 진왕은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다.

 

- <삼국지> 위지 동이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