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진왕제(辰王制) 가설 살펴보기 <3> - 진왕제의 완성과 변천

이름없는 꿈 2015. 2. 21. 02:02

백가제해(百家濟海)의 이력
요서 북부에서 발굴되는 이른바 ‘요하문명’의 고고학적 성과물들을 단군조선의 시원적(始原的) 정치체와 단군조선 자체의 중심지 유적, 유물로 추정한다는 가정 하에, 단군조선의 체제를 ‘연맹 제국‘으로 파악한다면 진왕제의 기원은 단군 체제라고 할 수 있다. B.C 3세기 무렵 단군조선의 ‘해체’ 이후 각 거수국(渠帥國)들은 각자의 ‘작은 단군’을 세우고 ‘작은 연맹’을 형성했을 것이다. 이 거수국들 중에서 큰 ‘지분’을 가지고 있는 나라들로 동북 만주 넓은 평원지대의 반농반목(半農半牧) 국가 부여(夫餘) 및 중원 국가들과 만주, 한반도를 연결하는 중개 무역으로 번성하게 된 기자조선(箕子朝鮮, 후의 위만조선) 등을 꼽을 수 있다. 

 

B.C 3세기 말 진(秦)의 중원 통일과 한(漢) 왕조로의 교체에 이르는 전란기에 수많은 유민들이 요서 지역으로 흘러들게 되는데 그 여파로 기자조선의 왕권이 위만 계열로 교체된다. 기자조선과 위만조선은 중원 지역과 만주-한반도 지역의 통로를 점유하는 요충지에 위치하여 중개무역으로 번성했는데, 이 지역의 무역과 교류 ‘인프라’를 둘러싼 각축이 이후 동아시아 고대사의 세력 관계를 좌우하는 핵심 요소 중의 하나가 된다. 이 ‘인프라’는 이른바 한사군(漢四郡)의 설치(B.C 108) 이후 요서 지역에서 바다를 통한 최대 근거리에 위치한 현재의 평안도, 황해도 지역까지 확장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고, 그렇다면 한사군의 각 군(郡) 명칭에서 유래된 낙랑(樂浪)과 대방(帶方)이라는 지명이 양쪽 지역에서 모두 나타나는 이유도 설명된다(김상 2004). 평안도, 황해도 지역의 ‘낙랑국’과 ‘대방국’은 요서 지역의 낙랑군과 대방군에 비해서는 더 중립적이고 독립적인 세력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김상 2004).

 

기씨 일족에서 위만으로 왕권이 교체될 때(B.C 2세기 초) 기자조선의 마지막 왕 준왕은 해로를 통해 한반도 방면으로 탈출하게 되는데 한사군의 위치를 요서 지역으로 비정한다면 준왕의 종착지는 평안도 지역이 된다. 준왕은 선진적 철기 문물을 바탕으로 한반도 중남부 지역 단군조선의 잔존 연맹소국들의 맹주권을 장악하게 되며 한왕(韓王)을 칭했다고 전해진다(김상 2004; 청주 한씨 족보). 이후 한왕을 맹주로 하는 삼한의 중심 지역은 낙랑국이나 대방국의 압력으로 남하하여 한강 유역을 거쳐 점차 아산만 지역까지 남하하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김상(2004)은 B.C 1세기 말 이러한 준왕의 경로를 거의 그대로 밟은 세력이 있다고 주장하는 데 바로 고구려에서 온 온조의 세력이다. 즉 <북사>에서 말하는 백제(百濟)의 기원으로서 “국초부터 백가제해(百家濟海)”했다는 기록은 충분한 근거가 있다는 것이다. <삼국사기> 온조왕조를 보면 초기에 서만주와 한반도의 지명과 지형이 모두 등장하다가 온조왕 후반으로 가면 한반도의 지명과 지형만이 등장한다고 한다.  

 

백제본기 온조왕조는 시기에 따라 크게 세 시기로 나늰다. <1기> 발해만 시대(요서시대)와 <2기> 발해만-한반도 세대, 그리고 <3기> 한반도 시대다. <2기>는 백제가 마한을 만나는 순간부터 낙랑과 헤어질 때까지다...
                                                                                                                                          - <삼한사의 재조명>, 김상(2004), p.138

 

백제의 축성기록을 보면 처음에는 주로 책(목책)을 세우다가 나중에는 주로 성을 쌓는다. 책은 주로 평야지대에 세우고, 또 세우기가 수월하여 이동 중일 때 임시 방어벽으로 쓴다. 반면에 성은 주로 산악지대에 쌓고, 또 쌓는 데 많은 노력이 소요되어 항구적인 방어벽의 성격이 강하다. 한반도는 70% 이상이 산악지대라서 성을 쌓는 것이 유리하다. 따라서 축성기록만 보면 백제는 평야지대에서 산악지대로 이동해온 것이 된다. 
                                                                                                                                          - <삼한사의 재조명>, 김상(2004), p.142

 

 

고구려의 초기 위치와 백제의 이동 경로 추정
온조의 남하 경로를 김상(2004)의 설로 설명한다면 이는 고구려의 초기 위치와 밀접한 관련을 가진다. 아직까지 학계의 통설은 고구려가 현재의 집안(集安, 국내성) 부근에서 건국했으며 수차례 옮겨지는 수도의 위치도 그 부근을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되어 있다. 이 통설은 꽤 굳건하여 오녀산성(五女山城) 같은 경우 아예 고구려 최초 수도로 못박아놓고 각종 역사유적 탐방단의 단골 코스가 되어 있다. 하지만 이 지역에서는 A.D 2~3세기 이전 고구려 유물이 발견되지 않는다는 점과 <삼국사기> 초기 기록에 이 지역이 수도라면 너무 먼 지역의 기록들이 나타난다는 점으로 보면 통설을 그대로 받아들이기에 무리라는 생각이 든다.

 

十一年 夏四月 王謂群臣曰 鮮卑恃險 不我和親 利則出抄 不利則入守 爲國之患 若有人能折此者 我將重賞之 扶芬奴進曰 鮮卑險固之國 人勇而愚 難以力鬪 易以謀屈... (중략) ...鮮卑果開門出兵追之 扶芬奴將兵走入其城 鮮卑望之 大驚還奔 扶芬奴當關拒戰 斬殺甚多 王擧旗鳴鼓而前 鮮卑首尾受敵 計窮力屈 降爲屬國... (후략)
11년 여름 4월, 임금은 여러 신하들에게 말하였다.
“선비(鮮卑)는 그들의 지세가 험한 것을 믿고 우리와 화친하지 않으면서, 이로우면 나와서 노략질하고 불리하면 들어가 지키니 나라의 근심거리로다. 만약 이들을 없애버릴 수 있는 사람이 있다면 나는 장차 그에게 큰 상을 줄 것이다.”
부분노(扶芬奴)가 나와서 말하였다.
“선비는 지세가 험하고 수비가 견고한 나라로, 사람들이 용감하나 어리석습니다. 힘으로 싸우기는 어렵지만 꾀로 굴복시키기는 쉽습니다.”
...(중략)...
선비는 과연 문을 열고 군대를 출동시켜 뒤쫓았다. 이때 부분노는 군사를 거느리고 그 성으로 들어가니 선비군이 그것을 보고 크게 놀라 되돌아 달려 들어왔다. 부분노는 성문을 지키며 막아 싸워 수많은 선비군들의 목을 베어 죽였다. 임금은 깃발을 들고 북을 울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선비가 앞뒤로 적을 맞게 되자 계책이 없고 힘이 다해 항복하여 속국이 되었다...(후략)

                                                                                                                                              - <삼국사기> 유리왕 11년(B.C 9) 조

 

二年 春 遣將襲漢北平漁陽上谷太原... (후략)
2년 봄, 장수를 보내 한(漢)의 북평(北平), 어양(漁陽), 상곡(上谷), 태원(太原)을 습격하였다...(후략)
                                                                                                                                              - <삼국사기> 모본왕 2년(A.D 49) 조

 

<삼국사기>에서 유리왕이 친히 참여하는 선비(鮮卑) 정벌 기사는 공성전(攻城戰)의 특징을 지니고, 모본왕의 중원 북부 공략 기사는 유목 기마병의 기습전 성격을 가진다. 전자는 고구려가 당시 현재의 대흥안령(大興安領) 기슭에 위치했다고 하는 선비족과 근접한 지역에 있었다는 것을 보여줄 수 있다. 또 후자의 ‘북평, 어양, 상곡, 태원’은 모두 후에 선비족 국가들과 타브가치족이 중심지역으로 삼게 되는 황하 이북의 북중국 지역으로서 기마병의 기습이라고 하더라도 국내성 지역에서는 너무 먼 거리이다. 또 국내성에서 중원 북부까지 기마병을 보낸다면 지나치게 긴 보급로 문제는 물론 요동과 요서에 즐비한 한(漢) 군현 세력들이 모두 알게 되어 ‘습격’이라고 말할 수조차 없게 된다.

 

따라서 고구려의 초기 ‘이동설’을 제기할 수 있는데, <삼국유사>, <위서> 등에 등장하는 북부여의 흘승골(紇升骨)성 기록과 광개토태왕비의 ‘엄리대수(奄利大水)’ 기록을 참고하면 부여 서북부의 동몽골, 북만주 지역에서 요서 북부 지역을 거쳐 압록강 유역의 국내성(集安) 지역까지 지속적인 이동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다면 위의 유리왕조와 모본왕조 기사에는 큰 무리가 없게 되며, 온조(비류 세력에 대해서는 기록상 모호한 점이 많으므로 일단 제외해둔다) 세력이 요서-해로-한강 지역 루트를 택했다는 추정도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닌 셈이다. 다만 고리국-부여-고구려로 이어지는 계보에 대해서는 고고학적 발굴을 포함한 면밀한 검토와 분석이 이루어질 필요가 있으며, 이를 통해서 고구려 초기 이동설의 진위와 초기 백제의 이동 루트를 따져볼 수 있을 것이다.

 

 

    몽골 울란바토르 국립역사박물관의 ‘코리왕’ 석상 (2015. 1).

      본래 동몽골의 ‘할힌골’ (Khalhin Gol) 지역에 있었다가 최근에

        옮겨졌고 ‘코리의 왕’의 석상이라는 구전이 전해져 내려온다(박원길 2008; p.148-149).

          이 석상을 경계로 서쪽(몽골 계통)과 동쪽(코리 계통)의 ‘형제’ 종족이 갈라졌다고 한다.

 

 

나는 고구려는 압록강 중류가 아니라 요하 상류에서 건국했다고 본다. 동명왕과 유리왕의 고구려 건국 초 기록에 한반도 기사는 거의 없다. 고고학적으로도 압록강 중류에서 발굴되는 고구려의 유물은 주로 3세기 이후의 것이다. 이것은 고구려의 중심이 2세기 이전에는 요동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국초에 후한과 그렇게 치열하게 싸웠던 것이며, 북중국을 휘저을 수도 있었던 것이고, 요서에 성을 쌓기도 하였던 것이다...
                                                                                                                                          - <삼한사의 재조명>, 김상(2004), p.138

 


한왕(韓王)에서 진왕(辰王)으로: 진왕제의 변천
<삼국사기>에 의하면 서기 8년 온조왕이 마한을 공격하였고, 서기 9년에는 마한이 멸망하였다.

 

二十六年 秋七月 王曰 馬韓漸弱 上下離心 其勢不能久 儻爲他所幷 則脣亡齒寒 悔不可及 不如先人而取之 以免後艱 冬十月 王出師 陽言田獵 潛襲馬韓 遂幷其國邑 唯圓山錦峴二城固守不下
26년 가을 7월, 임금이 말하였다.
“마한이 점점 약해지고 윗사람과 아랫사람이 서로 다른 생각을 하고 있으니 나라가 오래 갈 수 없으리라. 혹시 다른 나라에게 병합되면 순망치한(脣亡齒寒)의 격이 될 것이니 뉘우쳐도 소용이 없을 것이다. 남보다 먼저 마한을 손에 넣어 후환을 없애는 것이 좋겠다.”
겨울 10월, 임금이 사냥을 한다는 핑계로 병사를 내어 마한을 습격하여 드디어 나라를 합병하였으나, 오직 원산(圓山)과 금현(錦峴) 두 성은 항복하지 않았다.

                                                                                                                                              - <삼국사기> 온조왕 26년(A.D 8) 조

 

二十七年 夏四月 二城降 移其民於漢山之北 馬韓遂滅 秋七月 築大豆山城
27년 여름 4월, 원산과 금현 두 성이 항복해서 그 백성을 한산(漢山)의 북쪽으로 옮겼다. 이것으로 마한이 드디어 멸망하였다. 가을 7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쌓았다.
                                                                                                                                              - <삼국사기> 온조왕 27년(A.D 9) 조

 

<삼국지> 위지 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삼한의 우두머리를 진왕이라고 하며 마한에서 대대로 진왕위를 잇는다. 그렇다면 진왕은 마한에서 나왔을 것이고, 온조왕 이전에는 ‘한왕’으로 불리며 요서에서 건너온 ‘준왕과 부왕’의 후손들이 그 왕위를 담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마한을 합병한 온조왕은 첫 진왕이 되는 것이며, ‘백가제해’한 세력이기 때문에 외교적으로는 ‘백제왕’의 명칭을 얻는다(이것이 후대 3세기에 이르러 칠지도에 ‘백제왕세자’라고 적게 된 사연이라고 한다). 

 

온조왕은 한성백제의 왕으로서 진왕위를 담당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이후에는 영토가 축소되었을 뿐만 아니라 4대 개루왕(2대 다루왕, 3대 기루왕, 4대 개루왕에 대하여 김상(2011)은 기록상의 장자 상속을 믿기에는 지나치게 긴 재위기간으로 볼 때 복수의 왕력을 각 하나로 기록했다고 추정하며, 이 기술 원칙은 <일본서기>에까지 이른다고 주장한다)에 이르러 35년 동안이나 자립위왕(自立爲王)하지 못하는 사태가 발생했을 것이라고 한다(김상 2011). 

 

‘자립위왕’이란 진왕이 즉위했다고 하여 삼한 전체의 지도자 취급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삼한 연맹 소속의 소국 중 강력한 소국에서 왕후를 맞아 그 권위와 권력을 보증 받는 행위를 뜻한다. 만약 자립위왕에 실패했을 경우 그 통치자의 기록은 선왕 대에 흡수되거나 ‘왕세자’, ‘태자’ 등의 기록으로 역사에 기록된다. 김상(2011)은 이를 부여에서부터 내려온 제도라고 보고 ‘담로제’라고 부르며, 고려 태조 왕건의 등극과 호족 결혼을 통한 통치 구조가 대표적인 사례라고 한다. 만약 새로 즉위한 진왕이 혈통적인 측면 등에서 약점을 가질 경우, 또 강력한 소국이 자립하여 진왕을 칭하거나 하여 복수의 ‘진왕’이 등장할 경우 외교적 공인으로 자립위왕을 공고히 하는 경우도 있는데 중원 왕조의 ‘보증’에 의한 책봉 외교가 그 방식이다.

 

한성백제의 개루왕의 경우 결혼동맹에 실패하여 진왕의 지위를 금강 유역의 목지국왕에게 넘겨주니, 이후 4세기 후반 근초고왕 이전까지 한성백제는 삼한의 일개 소국의 지위로 내려앉는 처지가 된다(김상 2011). 3세기 고이왕의 경우 강력한 나라를 건설하였으나 역시 결혼동맹 실패로 자립위왕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하며, 근초고왕의 경우 재위 23년(368)에 이르러서야 신라 여인을 왕후로 세우고 자립위왕했다고 한다(김상 2011). 이는 삼한의 군사를 모아 371년 고구려와의 전쟁에 3만 대군을 동원할 수 있는 기반이 된 셈이다. 그런데 근초고왕은 외교적으로는 금강 유역의 진왕과 경쟁하는 처지로 372년 동진(東晉)에 사신을 보내지만 책봉을 받지는 못했다고 한다(<진서(晉書)>의 기록에 사신이 왔다는 기록은 있지만, <진서>나 <삼국사기>에 책봉 기록이 없다). 대신 5개월 후 금강 유역의 진왕(‘여구(餘句)’)이 ‘진동장군, 낙랑태수’의 책봉을 받았다는 것이다(김상 2011; 근초고왕이 ‘여구’라면 김부식이 <삼국사기>에 책봉 사실을 반드시 기록했을 것이라고 한다).    

   

4세기 말~5세기 초 광개토태왕의 백제 방면 원정은 한반도 지역의 진왕제의 틀도 완전히 바꿔놓게 된다. 금강 유역의 진왕위를 담당하던 ‘부여씨’의 ‘진왕백제’ 즉 ‘비류백제’는 광개토태왕에게 패배하여 열도로 이주하게 되며, 기존의 진왕위는 아신왕의 정변(392) 이후 부여씨가 왕권을 장악한 한성백제에게 옮겨지게 된다(진왕제 가설을 긍정할 경우, 온조왕에서 근초고왕을 거쳐 진사왕에 이르는 한성백제 왕실의 성씨는 해(解)씨로 볼 수 있다). 이 때의 진왕제를 김상(2011)은 ‘개량형 진왕제’로 부르며 근초고왕에서 전지왕 대에 이르는 삼한의 통치구조를 이룬다. 한편 열도에서는 기존의 ‘원형적 진왕제’가 그 모습을 유지하게 되는데 <일본서기>에서 여인(자립위왕을 위한 왕비족과 관련하여 진왕제에서는 핵심적인 요소이다)들의 기록이 큰 비중을 차지하는 원인이기도 하다.

 

현대 일본에서도 왕세자가 평민 출신과 결혼했다고 하여 가십 이상의 호들갑을 떠는 경우가 있었는데(세자빈은 왕실 내에서 ‘왕따’를 당했다고 한다) ‘자립위왕’의 조건을 스스로 포기한 거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막장드라마’의 단골 소재인 이런 문화 코드는 뜻밖에 옛날 옛적부터 한국이나 일본 문화의 기저에 면면히 흐르고 있던 셈이다.

 


5~6세기의 진왕: 백제와 왜국
김상(2011)은 5세기 초 이후 한반도에서 진왕제(담로제)가 쇠퇴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 있는데, 고구려와의 전선(戰線)에 접한 한성백제가 상대적으로 중앙집권적인 통치구조(이미 고이왕대에 좌평제(佐平制) 등 관료 제도를 확립한다)를 가지고 있었던 점과 무관치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담로제’와 같은 지방분권적인 체제는 전쟁 수행을 위해서는 비효율적이어서 같은 부여 계통인 고구려는 국초에 이 제도를 버리게 된다(김상 2011).

 

다만 열도에서는 진왕제가 강고히 유지되는데, ‘자립위왕’을 위한 조건인 ‘강력한 왕비족’은 영산강 유역과 금강 유역의 ‘부여씨’들이 담당했을 것이다. 이는 곤지가 왜왕위에 오르기 위해 왜국으로 건너가면서 반드시 부여씨 여인인 무령왕의 어머니를 데려가야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하지만 곤지는 왜왕위 등극을 위해 결혼동맹 조건의 충족으로는 부족하여 4세기 말 성립되어 뿌리를 내려가던 비류백제계 왜국의 동족 왕실과 물리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이 <일본서기>에 포악한 웅략왕의 모습으로 나타났다고 볼 수 있다. 곤지는 (그의 다른 아들들은 어느 정도 성장해서 데려갈 수 있었겠지만) 이런 위험이 예상되는데 갓 태어난 무령왕을 왜국에 데려갈 수는 없었을 것이다.     

 

5세기 이후 한반도에서 담로제가 쇠퇴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그 영향과 흔적은 계속 나타나게 되는데 대표적인 사례가 신라 왕실의 사위인 문주왕의 등극(475)과 동성왕의 신라와의 국혼(493)이다. 480년대 초반 동성왕은 백제가 국내외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던 것을 감안할 때 ‘자립위왕’에 준하는 지위를 확립하기 위해서 여러 가지 노력을 해야 했을 것이다. 결국 동성왕은 자기 자신보다는 주위의 인물과 세력의 성공을 통해 ‘능력’을 증명하여 이를 실현하게 되는데 이는 신라와의 국혼이 늦어지게 된 원인이기도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