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바다의 지배, 땅의 통치 - 백제와 고구려 <2>

이름없는 꿈 2016. 6. 13. 02:18

고구려와 땅 - 백제의 5세기 말 태수명 고찰 (1) : 조선(朝鮮), 낙랑(洛浪), 대방(帶方)
  이른바 ‘한사군(漢四郡: 한(漢)이 B.C 108년 설치한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4군, 대방군은 이후 3세기에 낙랑군에서 분할되어 설치) 위치 비정’에 대하여 필자는 ‘진왕제 가설 검토’ 제목의 세 글에서 한사군의 재요서설(在遼西說; 윤내현 1994 등) 또는 요서지역 ‘낙랑군, 대방군’과 한반도 서북부 지역 ‘낙랑국, 대방국’의 병존설(竝存說; 김상 2004 ; 김상 2011)에 가까운 입장을 취한바 있다. 전자는 ‘재야 사학자’로 분류되는 사학자와 그 지지자들의 시각이고 후자는 주류와 재야를 막론하고 흔치 않은 입장이다. 그런데 한사군 중 낙랑군을 제외한 진번, 임둔, 현도군은 오래 존재하지 못하고 폐지되거나 현도군처럼 밀려났으므로 낙랑군의 위치 비정이 주요 논쟁 대상이 되어왔다.


최근(2016년)에는 ‘주화입마(走火入魔)’에 빠진 듯한 한 ‘재야’ 사학자의 저명 주류 사학자에 대한 ‘임나일본부설’ 관련 소송 사건(역사적 사실은 언론 플레이나 정치적 동원, 오해와 오독으로 판단하여 결론내릴 수 있는 것이 아닌데 이 사학자의 경우는 기본적인 균형을 완전히 상실한 것으로 보인다)과 국가기관에서 편찬하려고 했던 대외용 ‘동북아역사지도’에서 한사군 위치 관련 논란(지도 출판은 결국 이루어지지 않았다)이 계기가 되어 “해도 너무 한다”고 분노하는 ‘주류 사학계’의 ‘반격’이 거세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낙랑군과 대방군이 한반도 서북부에 소재했었다는 주장은 주류 사학계의 통설로 굳어져 있는데 그 근거는 한사군이 설치된 것으로 기록된 시기(B.C 108) 이후 중원 지역의 영향을 받거나 이주자들의 것으로 보이는 유적과 유물이 일제 강점기 이후로 이 지역에서 풍부하게 발견되어 한중일 주류 사학자들의 견해가 일치했다는 것이다. 다만 주류 사학계는 이들 유적, 유물들로 볼 때 낙랑군이나 대방군은 중원 왕조의 직접 지배를 받는 ‘식민지’보다는 토착 세력의 통치가 유지되고 중원 지역의 문화적, 경제적 영향을 다소 받는 정치 세력에 가까웠다고 보고 있다.


이에 비해 한사군이 요서 지역에 소재했다는 주장은 중국 사서 해석을 통한 문헌 비정만을 근거로 한 것으로 실제 증거로 고려할 만한 유물은 요녕 지방에서 발견된 ‘임둔군 태수 봉니(臨屯郡 太守 封泥)’ 정도로 평안도 지역 소재설을 뒷받침하는 수많은 유물에 비할 바가 못 되는 것으로 평가된다. 특히 6세기 북위의 학자 역도원이 중국 사서에 낙랑군이 위치했다는 패수(浿水)의 물길 방향이 동쪽(<수경(水經)>) 또는 서쪽(<한서(漢書)> 지리지)으로 모순되게 기록된 것에 대해 고구려 사람에게 물어 ‘서쪽으로 흐른다’고 확답을 받았다는 기록(역도원, <수경주(水經註)>)은 문헌상으로도 당대에 낙랑군 위치가 한반도 서북부였다는 확신을 주는 사례로 운위된다.    


이렇게 볼 때 필자도 이제 ‘백제 한성 하남설’과 마찬가지로 현재까지의 실질적 증거들로 볼 때 ‘한사군 재요서설’을 지지하기는 어렵다고 할 수 있으나, 한사군의 성립 이후 한반도와 요동, 요서 지방의 세력 변화에 따라 ‘병존’ 또는 이동의 가능성을 제기하는 선에서 ‘절충’적인 입장을 취해보고자 한다. 다만 한사군의 위치는 그 이전 ‘위만조선’ 및 ‘단군조선’의 위치와 직접적으로 관련되므로 지난한 연구를 필요로 하는데 전문 학자들의 성과를 기대할 뿐이다. 한사군에 대한 주류 사학계의 위치 비정을 바탕으로 ‘고조선’ 영역을 추리할 경우 남으로 한반도 서북부, 북으로 요동 지역 일부에 이르는 ‘소(小)고조선설’(송호정 등)을 제기할 수 있다고 하며, 존재 시기도 B.C 10세기 정도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기 힘들다고 한다. 이는 윤내현 등의 ‘대고조선설’과는 사뭇 다른 비정인데, 주로 중국 학계나 정부 정책과 관련하여 ‘요하문명’의 성격과 귀속 주체에 대한 태도와 직결되는 문제로 필자의 개인적 시각으로는 아직 물음표를 달수밖에 없는 사안이다. 하지만 확실한 점은 그렇다고 하여 ‘아주 오래 전의 광활한 영토’를 가정하고 곧 ‘자랑스러운 역사’로 여기는 입장부터 세우고 고대 문헌을 오독하거나 태부족한 근거를 가지고 ‘소설’을 사실인양 널리 주장하는 태도는 지양되어야 마땅하다는 것이다.


이제 비로소 ‘고구려와 땅’에 대한 논의를 할 차례가 되었다. 고구려의 성장과 융성은 ‘낙랑’, ‘대방’ 지역의 점령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것이 통설이다. 그런데 이들 군현의 위치와 관련하여 재야, 주류 사학계 양쪽에 ‘양날의 칼’로 작용하는 역사적 사실이 고구려 미천왕의 낙랑군 정벌 및 병합(313년)과 대방 지역 점령과 주변국의 연쇄 반응이다. 즉 이때 장통(張統)이 이끄는 낙랑군 일부 세력이 고구려의 서쪽 변경에 접한 모용선비의 전연(前燕)에 귀부(歸附)하여, 전연의 왕 모용외가 낙랑군과 대방군을 요서 지역으로 이동시켰고 이후 북위 시대(5~6세기)까지 옮겨진 또는 이름뿐인 군현으로 존재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전연의 전성기를 이끈 모용황(慕容皝)이 집권하기 전 323~325년 사이에 동진(東晉: 317~420)에 의해 형식적 조공체제에 따라 조선공(朝鮮公)으로 책봉 받는 <진서(晉書)>의 기록이다. 이 때 ‘조선공’은 ‘낙랑군(郡) 조선현(縣)’의 우두머리로 해석되며, 모용선비의 집권자는 모용황의 아버지 모용외로 요동공(遼東公)의 지위를 가지고 있었다.


慕容皝字元眞, 廆第三子也. ...(중략) 廆爲遼東公, 立爲世子...  (중략)... 建武 (317-318)初, 拜爲冠軍將軍·左賢王, 封望平侯, 率衆征討, 累有功. 太寧 (323-325), 拜平北將軍, 進封朝鮮公.
모용황(慕容皝)은 자(字)가 원진(元眞)이고 (모용)외(慕容廆)의 셋째 아들이다. ... (모용)외가 요동공(遼東公)이 되자 그를 세자(世子)로 세웠다. ... (동진 원제) 건무(建武: 317-318) 초에 관군장군(冠軍將軍), 좌현왕(左賢王)으로 임명하고 망평후(望平侯)(현도군 망평현의 현후縣侯 cf.후한서 군국지에 의하면 요동군 망평현)에 봉하였고, 무리를 이끌고 정토(征討)하여 여러 차례 공을 세웠다. (명제) 태녕(太寧: 323-325) 말에는 평북장군(平北將軍)으로 임명되고 조선공(朝鮮公)(낙랑군 조선현의 현공縣公)으로 올려 봉해졌다.

                                                                                                                                                        - <진서(晉書)>, 재기(載記)
                                                                                                                    (원문 및 번역: http://krighty21.blog.me/50073123113)


이후 333년 모용황은 아버지의 죽음으로 요동공의 지위를 계승하여 전연의 실질적인 전성기를 이끌게 되었다. 342년 고구려에 침공하여 국내성을 함락시키고 미천왕과 왕후의 시신을 파간 것도, 346년 부여에 침공하여 5만의 포로를 잡아간 것도 모용황이다. 그리고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 모용선비 국가들의 멸망과 고구려의 요동 지역 확보 이후 중원 왕조의 형식적 책봉 기록에서 ‘낙랑공’(고국원왕), ‘요동군공’(장수왕 이후) 등의 명칭은 ‘고려왕(高麗王)’ 명칭의 앞에 붙어 고구려 태왕에게 수여된다. 


따라서 <남제서> 기록의 백제 태수직 앞에 붙는 지명을 검토해보면, 이는 5세기 말의 기록이므로 ‘낙랑’, ‘대방’, ‘조선’은 한반도 서북부를 가리킬 수도, 또한 요서 지역을 가리킬 수도 있다.


 - 용양장군 대방태수(龍驤將軍 帶方太守): 고달 (高達, 전 광양태수, 시기 미상: <남제서> 백제 사신 기록에 결락(缺落)이 있음)


 - 용양장군 낙랑태수(龍驤將軍  樂浪太守) 겸 사마(司馬): 모유 (慕遺, 495년)


 - 건위장군 조선태수(建威將軍 朝鮮太守) 겸 사마: 양무 (楊茂, 시기 미상)


 - 참군(參軍) 겸 진무장군 조선태수 (振武將軍 朝鮮太守): 장새 (張塞, 495년)


이들 기록에서 ‘용양장군’의 직위는 495년을 경계로 ‘고달’로부터 ‘모유’에게로 넘어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며, 다만 ‘대방’태수가 ‘낙랑’태수로 바뀌고 있다. 한편 ‘조선태수’는 ‘양무’에서 ‘장새’에게로 넘어가고 있다. 여기에서의 ‘낙랑’과 ‘대방’이 한반도 서북부를 가리킨다면 이 때 고구려의 수도 평양성이 위치한 핵심지역을 뜻하기 때문에 백제의 태수직은 ‘허직’(虛職)이 분명하게 된다. 또한 요서 지역을 가리킨다고 해도 북위의 지배력이 미치는 지역이기 때문에 역시 ‘태수’가 실질적인 지위라고 보기 힘들게 된다.


그러나 ‘태수’보다 ‘장군’ 직위에 초점을 맞추게 되면 이해할 수 있는 여지가 없는 것도 아니다. ‘낙랑’ 및 ‘대방’이 한반도 서북부를 뜻할 경우, 백제가 근초고왕 대에 점령했던 적이 있고 5세기 후반이면 ‘한성’까지 포함하여 수복 의지를 불태울 때이다. 즉 최전방의 ‘장군’에게 ‘수복 후’ 직위로 ‘태수’를 임명하여 점령 후 통치권까지 보장했다고 보면 된다.


‘낙랑’ 및 ‘대방’이 요서 지역이라고 하더라도 비슷한 개념으로 생각할 수 있다. 이 지역은 일찍이 초기 백제의 이동 통로였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며, ‘요서백제’의 존재 지역으로 항상 거론되어왔고 필자의 이전 포스팅에서 상술했던 것처럼 4~5세기 모용선비 국가들의 근거 지역으로 백제인과 부여인들이 활동했을 가능성이 큰 지역일 수도 있다. 따라서 ‘수복 의지’가 있다면 역시 최전방 수군(水軍) ‘장군’들에게 점령 후 태수직 보장이 이루어졌을 수 있다.


태수로 임명된 인물들의 면면을 보면 요서 지역 쪽의 가능성이 더 크지 않을까 하는데 역시 필자의 ‘소설’임을 분명히 하겠다. ‘고달’의 ‘고(高)’씨 성은 후연을 멸망시킨 북연의 건국자 ‘고운(高雲)’ 및 6세기 들어 북위 조정을 좌지우지하게 되는 외척 세력 ‘발해 고씨’와 닿아 있을 수 있다. 또 ‘모유’의 ‘모(慕)’씨 성은 모용선비의 ‘모용씨’에 가까운 느낌이 든다. ‘조선태수 양무’나 ‘장새’의 양(楊), 장(張)씨도 당시 한반도 지역의 흔한 성씨는 아니고 오히려 중원 지역의 것이라는 생각도 들지만, 이들의 정확한 출자는 알 길이 없으니 상상력으로 때울 뿐이다.



바다와 강과 백제 - 백제의 5세기 말 태수명 고찰 (2) : 광릉(廣陵), 광양(廣陽), 청하(淸河), 성양(城陽)

백제 동성왕이 남제에 임명 승인을 요청한 ‘조선’, ‘대방’, ‘낙랑’ 태수직은 미래의 ‘국토 수복’을 가정하고 최전방 군사직에 덧붙인 명예직에 가깝다고 추정할 수 있으나, 필자는 ‘광릉, 광양, 청하, 성양’ 태수직의 경우 중원 해안 지역의 상업 세력과 관련하여 좀 더 적극적이고 실질적인 직위가 아니었을지 생각하게 된다. 즉 필자가 행했던 ‘요서백제와 월주백제’에 대한 추정을 바탕으로 하여 이들 ‘태수’는 주로 회수 이남과 장강 하구를 중심으로 한 ‘월주백제’ 거점의 ‘특별군사행정구’ 수장에 가까운 직위로 가정하고자 한다.


이 가정이 맞는지 알아보기 위해 필자는 <남제서> 지리지에서 이들 지명을 곧바로 찾아보는 ‘무식한’ 방법을 사용하도록 하겠다. 이러한 방법은 대단히 ‘나이브’하지만 어떤 선입견도 배제한 채 실제를 추리해볼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필자가 참조한 <남제서>는 2014년 남경에서 구입한 ‘중화서각(中華書閣)’ 2012년 출판본이다.


본격적인 추정에 앞서 염두에 둬야 할 것은 중국 삼국시대에서 남북조 시대에 이르는 왕조들의 지방행정체계로 흔히 ‘군현제’라고 불리는 ‘주(州)-군(郡)-현(縣)’ 체제이다. ‘주’는 가장 큰 행정단위로 왕족 또는 주요 귀족들이 수장으로 임명되는 경우가 많고 ‘자사(刺史)’라고 하며, ‘군’은 ‘주’ 다음의 단위로 그 수장이 바로 ‘태수(太守)’이다. ‘현’은 군현제의 마지막 하부 단위로 그 수장을 ‘현령(縣令)’ 또는 ‘현장(縣長)’이라고 하며, 전연 모용씨(‘요동공’)나 고구려(‘요동군공’)처럼 외부 세력에 대한 형식적 책봉체제에서는 지명 뒤에 ‘공(公)’, ‘왕(王)’ 등이 붙기도 한다. 즉 외국의 왕이 중원 왕조에게서 조공 체제의 책봉을 받을 경우에도 현(‘요동공’), 군(‘요동군공’), 주(6세기 후반 백제 위덕왕이 북제(北齊)에게서 수여받은 ‘동청주자사(東靑州刺史)’ 등) 체계가 적용되며 그 단위가 높아질수록 중원 왕조 입장에서 해당 국왕의 지위(즉, 중요도)가 높음을 의미한다.


‘태수’는 ‘군’의 수장이므로 <남제서> 지(志)에 열거된 ‘군’을 찾아본 결과 백제 태수명에 대응되는 군은 두 곳 정도에 불과했는데, ‘광릉군(廣陵郡)’과 ‘남청하군(南淸河郡)’이 그러하다.


그렇다면 이들 중원 지명이 붙은 백제 태수직도 허직(虛職)에 불과한가? 아직 결론내리기에는 이르다. 중원 왕조는 외국의 왕에게도 자국의 ‘황제’에 대응하여 신하로서의 ‘군사’, ‘장군’에 붙여 왕보다 한 단계 이상 아래인 ‘자사’, ‘공’ 등의 행정직을 수여한다는 점을 생각해야 한다. 즉 백제왕이 임명하여 남제 황제에게 승인을 요청한 ‘태수’의 경우에도 ‘군’ 단위보다 한 단계 이상 아래의 단위 수장에게 수여된 직위일 가능성이 있다.

따라서 <남제서>에서 ‘현’ 단위까지 백제 태수명 앞에 붙는 지명을 찾아본 결과 다음과 같다. (강조는 필자)


南徐州
南淸河郡
東武城 淸河 貝丘 繹幕(縣)


南豫州
宣城郡
廣德 懷安 宛陵 廣陽 石城 臨城 寧國 宣城 建元 涇 安吳(縣)


南兗州
廣陵郡
海陵 廣陵 高郵 江都 齊寧(縣)


廣州
新寧郡
博林 南興 臨㳘 甘泉 新城 威平 單牒 龍潭 城陽 威北 歸順 初興 撫納 平鄕(縣)


郢州
方城左郡
城陽 歸義(縣) 
                                                                                                                                     - <남제서>, 지(志) 주군상/하(州郡上/下)


위와 같은 <남제서> ‘지’의 ‘검색’ 결과에서 보듯이 일단 백제 태수직 앞에 붙은 지명들은 그 시대에 모두 존재했던 지명이다. 그렇다면 이들 지명이 존재한 지역이 어디인가를 찾아볼 차례로 다음 지도들을 참고하겠다. 이 지도들은 중국 포털 바이두(百度)의 ‘바이두백과(百度百科)’에서 ‘남제’ 항목에 있는 지명 비정을 인용한 것이다.






                            중국에서 추정하는 남제(南齊)의 ‘남서주’, ‘남예주’, ‘남연주’ 및 ‘청하’, ‘광양’, ‘광릉’의 위치(붉은 원).

       (처음에 올렸던 지도에서는 '청하'인 것으로 알고 붉은 원을 표시한 곳이 '곡아(曲阿)'이므로 착오를 정정함. 위 지도에서는 '청하'가 특정되지 않았으므로 '남서주(南徐州)' 전체를 붉은 원으로 표시함. '청하'에 대한 지명 탐구 결과 남제의 '남청하군'은 지금의 하북성, 산동성 지역에 있던 지명을 옮긴 '망명' 지명으로 생각됨: 2016. 6. 19 필자)

출처: 바이두백과(百度百科) ‘남제’ 항목


지도에서 보듯이 ‘청하’, ‘광양’, ‘광릉’의 경우 최상위 단위인 ‘주’의 위치로 볼 때 한결같이 장강 하류 또는 남경(건강성) ‘수도권’에 위치하는 것으로 보이며, 남서주, 남연주 같은 경우 장강 하류 남북에 위치하며 북위와 대치하는 최전방에 근접할 뿐만 아니라 장강 수운(水運) 및 서해 해운과 관련한 요충지에 위치한다고도 볼 수 있다. 한편 ‘광양’현이 위치한 ‘남예주’‘선성군’은 건강성 남쪽에 위치하는데 농경이 발달한 남부 내륙지역에 연결된 통로 상에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로써 직접 <남제서> 상의 지명을 찾아보는 무식한 시도의 결과로도 백제의 5세기 후반 4개 지역의 ‘태수’는 단순한 허직으로 붙은 명칭이 아니라, 남제 내에서 백제의 상업적·군사적 이익과 관련한 모종의 특별행정직에 가깝다는 필자의 ‘소설’은 어느 정도 근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데 본격적인 분석과 연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랄 뿐이다.


그런데 다른 지역과는 달리 ‘성양’은 두 곳에 나타날 뿐만 아니라 장강 하구나 건강성 주변과는 매우 멀리 떨어진 지역에 비정되는데 ‘성양’ 지명이 있는 ‘영주’와 ‘광주’는 다음 지도와 같다.



중국에서 추정하는 남제 시대 광주(廣州)의 신녕군(新寧郡) 위치(붉은 원)
출처: 바이두백과(百度百科) ‘남제’ 항목



중국에서 추정하는 남제 시대 영주(郢州)의 위치
출처: 바이두백과(百度百科) ‘남제’ 항목



‘광주’의 경우 현재의 광동성(廣東省) 서부와 광서장족자치구(廣西莊族自治區) 동부를 포괄하는데 ‘월주(越州)’를 둘러싸고 있다. 참고로 ‘월주백제’라 할 때 ‘월주’와 남제 시대의 ‘월주’는 다른 지역을 의미하는데, 전자는 춘추시대 오(吳)나라와 월(越)나라가 위치한 장강 하구 지역을 의미하고 ‘오월동주(吳越同舟)’의 그 ‘월’을 뜻하며, 후자는 남월(南越) 등 이민족들이 거주하는 중국 최남단 지역으로 본래 월주(粵州, ‘粵’은 현재 광둥성의 별칭)라 불리는데 남제 시대에는 ‘越州’라고 기록되어 있다.


‘성양현’(상기 지도에서는 특정되지 않았다)이 있었다는 ‘신녕군’은 현재의 홍콩 및 선전(堔圳), 광저우(廣州)에서 크게 멀지 않은 해안 부근 서쪽에 위치해 있다. 그렇게 보면 이 ‘성양’은 일부 재야 사학 관련 인사들이 광서장족자치구 지역에서 발견했다고 하는 현존 지명인 ‘백제향(百齊鄕)’, ‘백제허(百齊墟)’ 등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지역이 아닐 수 없는데 백제의 해양 거점으로서 그러한 상상이 가능하다. 하지만 일단 ‘백제향’, ‘백제허’의 경우 주류 사학의 견해로는 백제와 관련이 없거나 백제 멸망 후 왕자 부여풍(夫餘豊)의 유배지로 추정하는 정도라는 점은 염두에 둘 필요가 있다.


‘광주’의 ‘성양’에 비교할 때 ‘영주’의 ‘성양’은 중국 삼국시대 이래 남조 왕조들의 핵심 거점 중 하나인 형주(荊州)의 남부 지역으로서 매우 내륙에 위치하여 백제 태수의 임명 지역으로는 가능성이 많이 떨어지는 것으로 보인다. 또한 이 지역은 항상 남조 왕조의 골칫거리로 등장하는 이민족인 ‘만족(蠻族)’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인데 백제와 만족의 관계가 잘 알려진 바는 없다.


한편 이들 중원 지역에 임명된 태수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건위장군 광양태수 겸 장사(長史)’ 고달은 후에 ‘용양장군 대방태수’로 옮겨가는 인물이며, ‘건위장군 조선태수 겸 사마(司馬)’를 역임했던 양무는 이후 ‘건위장군 광릉태수’에 임명된다. 또 ‘회매(會邁)’라는 인물이 ‘광무장군 청하태수(廣武將軍 淸河太守)’에 제수되고 있으며, 백제-북위 전쟁 이후 ‘왕무(王茂)’라는 인물이 ‘건무장군 성양태수(建武將軍 城陽太守) 겸 사마’에 임명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이들 4개 지역 태수들은 동시에 존재했던 것은 아니며 때에 따라 임명된 특별직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볼 수 있다. 필자는 중원 지역 태수들이 ‘백제인’ 내지 ‘한반도인’이 아니라 중원 지역 인물이거나 산월(山越)·남월 등 이민족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특히 ‘성양태수 왕무’는 그 지역 비정으로 살펴볼 때 이민족일 가능성이 크다고 추정해본다.  


그런데 <남제서>에 기록된 백제-북위 전쟁에서 전공(戰功)을 세운 이들은 4인인데 그 중 3인이 해(解), 사(沙), 목(木) 등 이른바 백제 ‘8성 대족’의 성을 가지고 있으며, 4인 모두 후에 한반도 호남 지역으로 비정되곤 하는 지역의 후왕(侯王)으로 임명되고 있다. 다음 포스팅부터는 본격적으로 백제-북위 전쟁에 대해 이들 ‘4장군’을 중심으로 살펴보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