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성왕의 후왕(侯王) 임명
是歲, 魏虜又發騎數十萬攻百濟, 入其界, 牟大遣將沙法名·贊首流·解禮昆·木干那率衆襲擊虜軍, 大破之. 建武二年, 牟大遣使上表曰 臣自昔受封, 世被朝榮, 忝荷節鉞, 剋攘列辟. 往姐瑾等竝蒙光除, 臣庶咸泰. 去庚午年, 獫狁弗悛, 擧兵深逼. 臣遣沙法名等領軍逆討, 宵襲霆擊, 匈梨張惶, 崩若海蕩. 乘奔追斬, 僵尸丹野. 由是摧其銳氣 鯨暴韜凶. 今邦宇謐靜, 實名等之略, 尋其功勳, 宜在襃顯. 今假沙法名行征虜將軍·邁羅王, 贊首流爲行安國將軍·辟中王, 解禮昆爲行武威將軍·弗中侯, 木干那前有軍功, 又拔臺舫, 爲行廣威將軍·面中侯. 伏願天恩特愍聽除. ... 詔可, 竝賜軍號.
이해(490년) 위노(북위)가 또 기병 수십만 명을 내어 백제를 공격하여 국경에 들어왔다. 이에 모대(동성대왕)는 장수 사법명․찬수류․해례곤․목간나를 파견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위노 군사를 기습하여 크게 깨뜨렸다. 건무 2년(AD495년) 모대가 사신을 보내 표문을 올려 말하기를, “신 자신이 앞서서 봉작을 받았고 대대로 조정의 영광을 받았는데 부여받은 부절과 부월을 욕되게 하겠습니까? (북위의 침략군을) 이기고 물리쳐서 적들을 줄줄이 달아나게 하였습니다. 이에 여기 가는 저근 등은 모두 빛나는 제수를 받았사옵기에, 신은 모두 함께 기뻐하는 바입니다. 지난 경오년(AD490년)에 험윤(북위)이 저희들의 죄를 뉘우치지 아니하고 군사를 일으켜 깊숙이 쳐들어 왔습니다. 신이 사법명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북위를 토벌하게 했습니다. 야간에 습격하여 번개같이 공격하였더니 흉리(북위)가 크게 당황하여 무너지는 것이 바닷물로 쓸어버리는 것 같았습니다. 말을 몰아 패주하는 적을 추격하여 베어죽이니 그 시체가 평원을 붉게 물들였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북위군사들은 날카로운 기운(銳氣)와 고래의 난폭함이 꺽여서 흉악함을 감추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임시로 '사법명'을 정로장군 매라왕직을 수행시켰고, '찬수류'는 안국장군 벽중왕 직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해례곤'은 무위장군 불중후 직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목간나'도 앞에서 말한것과 같은 군공이 있고, 돈대와 배(대방) 즉, 항구와 함선들을 빼앗았으므로 광위장군 면중후 직을 수행하게 했습니다. 업드려 원하니 하늘의 은혜로써 특별히 힘써 들어시어 제수해 주십시오.” ... (중략) ... 조서를 내려 옳다 하고 아울러 군호를 내려주었다.
- <남제서> 만동남이전
위의 <남제서> 기록에서는 490년 북위의 백제에 대한 재침(再侵)이 기록되어 있고, 백제군의 대승이 보고되고 있다. 이 승리에 대한 공로로 동성왕이 ‘사법명, 찬수류, 해례곤, 목간나’ 등 4인을 후왕(侯王)으로 임명하고 495년 남제 황제의 승인을 요청했다고 하며, 그 관작은 다음과 같다.
정로장군 매라왕(征虜將軍 邁羅王) 사법명 (沙法名)
안국장군 벽중왕(安國將軍 辟中王) 찬수류 (贊首流)
무위장군 불중후(武威將軍 弗中侯) 해례곤 (解禮昆)
광위장군 면중후(廣威將軍 面中侯) 목간나 (木干那)
이들 4인 중 3인이 ‘사(沙)’, ‘해(解)’, ‘목(木)’ 등 백제 ‘8성 대족’의 성씨를 가지고 있으며, 양무, 고달, 모유, 장새 등의 인물들처럼 ‘태수(太守)’직을 수여받지 않고 개로왕대에 왕족 여곤(餘昆), 여기(餘紀)가 좌현왕, 우현왕에 임명된 것과 같이 후왕에 제수되는 것으로 보아, 이들은 요서나 월주 지역보다는 한반도 및 열도 출신일 가능성이 크지 않을까 여겨진다. 사법명과 찬수류가 해례곤과 목간나의 ‘후’보다 높은 작위인 ‘왕’을 수여받고 있는데 군공(軍功)의 크기에 따른 것인지 연공서열에 따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백제 태수직과 마찬가지로 4장군의 후왕 명칭에 있는 ‘매라, 벽중, 불중, 면중’이라는 표현은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한반도 서남부에 몰려있으며, 사법명이 분봉(分封)받은 ‘매라’는 전북 옥구, 찬수류의 ‘벽중’은 전북 김제, 해례곤의 ‘불중’은 전남 보성 일대, 목간나의 ‘면중’은 전남 광주에 비정된다고 한다(이도학 2003). 즉 이들 4장군은 영산강 유역과 그 인근 지역에 대한 작위를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이 해당 지역 출신으로 연고권을 가졌기 때문에 이들 작위를 받은 것인지 또는 동성왕이 해외에서의 군공에 대한 상으로 본토 주요 지역의 지배권을 보장해준 것인지는 파악하기 힘들다.
다만 이들 <남제서> 작위 임명 기록은 영산강 유역과 그 인근 지역에서 허다하게 발견되는 대형 옹관묘와 금동관, 환두대도 등 유적, 유물과 매우 잘 부합하기 때문에, 학계에서는 대체로 이를 근거로 5세기 말 ~ 6세기 초에 걸쳐 호남 지역에 대한 백제의 중앙집권적인 지배력이 확대되었다고 해석한다. 그러나 김상(2011) 등은 이들 기록과 유물이 도리어 백제-북위 전쟁 승리 이후 4장군 등 유력 제후들의 분권적 영향력이 절정에 달하여 압력을 받은 동성왕이 마지못해 이들을 후왕에 임명하고 남제의 승인을 얻어 공식화한 근거인 것으로, 즉 연맹 왕국적 특성이 더 짙어진 것으로 해석한다. 필자가 보기에도 전쟁은 490년에 있었는데 5년이나 지난 시점에 후왕 임명이 이루어진 점은 이런 사정을 의심할 만하다고 생각된다. 또한 495년 이전 490년을 전후(김상 2011)해서 이루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후왕 임명 기록 중에 다음과 같이 ‘면중후’ 해례곤의 전임(前任)으로 생각되는 작위가 보인다.
- 영삭장군(寧朔將軍) 면중왕(面中王) 저근(姐瑾)을 관군장군(冠軍將軍) 도장군(都將軍) 도한왕(都漢王)에 임명
그 외에도 3명의 후왕 임명이 있는데 왕족 부여(夫餘)씨로 생각된다.
- 건위장군(建威將軍) 여력(餘歷)을 용양장군(龍驤將軍) 매로왕(邁盧王)에 임명
- 건위장군 팔중후(八中侯) 여고(餘古)를 영삭장군 아착왕(阿錯王)에 임명
- 광무장군(廣武將軍) 여고(餘固)를 건위장군 불사후(弗斯侯)에 임명
이도학(2003)은 ‘도한’을 전남 고흥, ‘매로’를 전남 장흥, ‘아착’을 전북 익산, ‘불사’를 전북 전주에 비정하고 있는데 그 비정이 옳다고 가정할 경우 이들 분봉 지역 역시 호남을 벗어나지 않는다. 한편 김상(2011)은 ‘4장군’을 포함하여 이들 8인의 후왕 중에 498년 동성왕의 무진주(武珍州) 출병과 무력 시위를 겪고 굴복하거나, 이에 저항하다 왜국으로 건너가 정권을 전복하게 되는 무열(武烈)과 그의 세력 및 반대 세력(무령왕 사마와 연계된 듯한 세력으로 왜국에서 무열과 내전을 벌이게 된다)이 있다고 추정하고 있다. 이들이 소수의 병력으로 왜국의 정권을 장악할 수 있었던 힘은 백제-북위 전쟁으로 축적된 군사 경험과 노하우였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필자의 사극에서 왜국의 권력 투쟁에 관련된 인물과 사건 전개의 틀은 김상(2011)의 추정에 빚진 바가 많음을 밝혀둔다.
‘4장군’의 인물 추정과 설정
<남제서> 만동남이전 기록 이외에 백제 ‘4장군’에 대해 알 수 있는 문헌 자료나 유물은 전혀 없기 때문에 필자의 사극에서 이 인물들에 대한 설정 역시 역사적 맥락과 연결하여 전적으로 ‘지어낼’ 수밖에 없으며, 다음과 같이 설정할 생각이다.
사법명: 4장군 중 가장 나이가 많고 개로왕대에 우현왕 여기(餘紀) 휘하로서 월주 지역으로 이주한 이후 30년 이상 거주하면서 남조 왕조와의 외교와 군사 협력에 종사한 원로. 백제-북위 전쟁에서 자신의 경험을 십분 발휘한다. 극중 비중은 작은 편.
찬수류: ‘배에서 태어난 천상 뱃사람’으로서 어린 시절부터 남으로는 남월(南越), 북으로는 요서, 동으로는 백제, 탐라, 가야와 왜국까지 바닷길을 섭렵한 ‘장보고’의 ‘백제 선배’ 쯤 되는 비중이 큰 조연 인물이다. 자신의 선단을 거느리고 해상 치안 활동을 하며 이 과정에서 각국의 지배 세력과 연관을 맺게 된다. 백제-북위 전쟁에서 목간나와 함께 첩보와 수군 전투에 있어 혁혁한 공을 세워 벽중왕에 제수되지만 이후 백제와 왜국의 내부 권력투쟁에 개입하여 불행한 운명을 맞는다. 즉 줄거리 상 5세기 말 왜왕 무열의 즉위 과정에서 무열과 대립하게 되는데 <일본서기>의 한 등장인물과 동일 인물로 설정했기 때문이다.
해례곤: 임명받은 작위가 ‘후(侯)’에 불과함에도 필자가 주연 급의 비중으로 격상시켰는데, 판타지 소설의 주인공을 연상시킬 정도로 멋진 발음의 이름을 가진 실존 인물이라는 점 외에도 한성 함락 이후 백제 웅진 시대 초기를 뒤흔든 해(解)씨라는 점이 상상력을 자극했다. 설정 상, 해례곤은 사마(斯麻)보다 두 살 정도 많은, 병관좌평 해구(解仇)의 조카뻘 친족으로 해씨 가문의 기대를 한 몸에 받는 출중한 청년이었으나 해구의 정권 장악 과정에서 그를 반대하고 곤지의 편에 서는 바람에 가문에서 축출 당한다. 곤지 피살 후 사마 및 백가와 함께 도망치지만 해구가 보낸 별동대의 추격을 받아 바다로 탈출하며 풍랑을 만나는 등 고초를 겪은 끝에 월주백제에 도착한다. 해구의 난이 진압되고 동성왕이 즉위하자 사마와 백가는 본토로 귀국하지만 해례곤은 남아 월주백제의 육군 육성에 주력하며, 백가의 여동생으로 상업, 무역과 남제 조정에 대한 ‘로비’에 종사하던 백선(苩仙, 가상 인물)과 사랑에 빠져 결혼하게 된다. 백제-북위 전쟁에서 그는 기발한 전략으로 북위군의 주력인 기병 전력을 전멸시키는 큰 무공(武功)을 세우지만, 공의 많은 부분을 사법명에게 양보하고 ‘후’에 만족한다.
목간나: 설정 상 곤지의 충신(忠臣)이며 노신(老臣)인 목만치(木滿致)의 늦둥이 아들로 왜국과도 연계를 가진 월주백제의 중심인물로 등장한다. 유송(劉宋) 말기 ‘왜왕 무(武)’의 사신으로 활동하기도 하며 백제-북위 전쟁에서는 찬수류를 도와 북위 수군 전력을 궤멸시키는 공을 세우지만, 역시 이후 왜국의 권력 투쟁에 개입하여 무열과 찬수류 세력의 사이에서 생존의 선택을 강요받게 된다.
다음 포스팅은 백제-북위 전쟁의 실질적인 배경과 전쟁 상황에 대한 추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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