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답사

오월(吳越) 기행 (2) - 장쑤성 양주(양저우, 揚州), 남경, 단양(丹陽)

이름없는 꿈 2016. 12. 11. 20:59

양주: 광릉(廣陵)의 현재를 보다
올해(2016)년 6~7월 필자는 이른 여름휴가를 맞아 3박 4일간 중국 양주와 남경, 그리고 단양을 답사했다. 양주는 그 옛 지명이 ‘광릉’으로, 남경에서 북동쪽으로 장강을 건너 일반 철도로도 50분이면 닿는 근거리의 장쑤성 주요 도시이다.  


<남제서> 백제 기록의 ‘태수’ 임지 중의 하나인 ‘광릉’은 지금도 양주시 일부의 지명으로 남아있는데, 양주시의 도심이 바로 ‘광릉구’(廣陵區)이다.


                                                                 양주시 광릉구 (붉은 선 안쪽 부분; 출처-구글맵 캡쳐)


2년 전과 달리 외국에서도 중국 철도편의 예약이 가능했다. 하지만 중국 D항공사의 저렴한 상해행 항공권을 예약한 대가(?)로 첫날 항공편이 2시간이 넘게 연발(延發)하는 바람에 기차 예약을 급히 줄줄이 늦췄고, 결국 해질녘이 되어서야 상해와 남경을 거쳐 양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둘째날 필자의 첫 행선지는 양주의 ‘당성유지(唐城遺址)’였다. 때가 때인지라 마침 장마전선이 제주도 남쪽 해상과 장강 하구 지역에 걸쳐 있었고 필자는 비가 오지도 않는 서울에서 장마전선을 부러 찾아온 격이 되어 쏟아지는 비를 감수하는 수밖에 없었다.


양주에서 5세기 후반 당시 ‘광릉’의 흔적을 찾는 것은 남경에서보다도 훨씬 힘들다. 7세기 초 수 양제(隋 煬帝)의 ‘대운하’ 건설에 있어 양주는 장강 이북의 출발점이었고, 이후 천년에 걸친 ‘대개발’로 인해 양주는 물론 오월지역 일대의 지형과 물길이 모두 바뀌어버렸다. 따라서 확실하게 남아있거나 복원된 유적의 대부분은 당대(唐代) 이후의 것들이다.



                                                                               당성유지 입구 (2016. 7)



                                                                              당성유지 입구 (2016. 7)


‘당성유지’는 당대 회남도(淮南都)의 행정중심지이던 양주의 성벽을 복원한 것으로, 성벽 내부의 상당 부분을 ‘최치원기념관’이 차지하고 있다. 신라 사람으로 9세기 후반 당의 과거에 급제하여 양주에서 4년간 관직에 있었던 최치원은 1992년 한중 수교 이후 ‘한중교류사’의 상징으로 부각되어 2007년 그 기념관이 건립되었다.



                                                                          최치원기념관 전경 (2016. 7)



                                                         당대 회남도(淮南都) 영역 (양주 최치원기념관, 2016. 7)



                                                                       당대(唐代) 양주성 (양주 최치원기념관, 2016. 7)


양주, 즉 ‘광릉’은 8~9세기 대운하와 장강을 통한 당의 상업과 교역 중심지로 산동반도와 회남(淮南), 장강 이남 등 중국 동해안에 걸쳐 산재한 신라방(新羅坊), 신라소(新羅所) 등 재당 신라인(在唐 新羅人) 사회에 있어서도 중요한 지역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최치원 이전에는 물론 장보고 등의 활약이 두드러진 지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장보고의 일대기를 다룬 최인호의 소설 <해신>과 동명의 드라마에서도 주요 배경으로 등장한다. 이러한 재당 신라인 사회의 기록들은 5~6세기 광릉에서도 ‘광릉태수’를 비롯해 백제의 깃발을 걸고 활동했을 이들을 충분히 상상하게 한다.


최치원기념관을 비롯하여 당성유지를 한 바퀴 돌고 나니 스마트폰 카메라에 의존하던 필자에게 큰 문제가 생겼다. 간혹 배터리가 급속도로 닳는 것은 물론 여러 기능에 문제를 보이던 스마트폰이 이제는 아예 꺼져 버렸고, 배터리 교체를 해도 켜지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잠시 소강상태를 보이던 빗줄기도 다시 강해졌다. 이 스마트폰은 비가 올 때 유독 기능에 문제가 생기기는 했었다. 필자는 제일 중요한 사진 기록을 남길 수 없게 되었기 때문에 매우 난감했지만 일단 시내버스를 타고 다음 행선지인 당성유지 동쪽의 광릉왕묘(廣陵王墓)로 향했다.  


광릉왕묘는 한(漢) 최전성기의 황제이며 B.C 108년 위만조선을 멸망시킨 무제(武帝)의 4자인 유서(劉胥)의 묘이다. 광릉군(廣陵郡)은 중국 전한(前漢) 건국과 함께 전국시대 초(楚)나라 영역이던 지금의 양주 지역에 설치된 군현으로 B.C 201년 처음 설치될 때의 명칭은 동양군(東陽郡)이다. B.C 120년 처음으로 ‘광릉군’이라는 명칭으로 바뀌었고, B.C 117년 유서가 이곳에 광릉왕으로 봉해져 ‘광릉국’으로 불렸다. B.C 54년 선제(宣帝)가 유서와 그의 아들들을 열후(列侯)로 격하시키고 선제 자신의 어린 아들 유홍을 고밀왕(高密王)에 봉하자, 유서는 이에 불복했고 선제는 역적으로 간주하여 그를 사사(賜死)했다. B.C 47년 원제(元帝)에 의해 그와 일족의 신분이 회복되었다.


1979년 발견된 광릉왕묘는 옥(玉)을 엮어 만든 수의로 유명한 후난성(湖南省) 마왕퇴(馬王堆)와 동일한 방식으로 시신을 매장한 황장제주 목곽분(黃腸題湊 木槨墳)으로 그 크기가 마왕퇴의 18배에 이르는 거대 능묘인 것으로 유명하다. 1급 문화재인 만큼 보존과 관리 상태는 매우 뛰어났다.


소나기가 계속 쏟아지고 있는 가운데 정작 필자의 눈길을 끈 것은 왕묘 보존전시관 앞의 샛길에 있는 ‘남조석각묘(南朝石刻墓)’라는 표지였다. 표지를 따라가자 발견한 것은 뜻밖에 남조 시기의 전실묘(塼室墓), 즉 벽돌무덤이었다. 설명을 보니 양주에서 45km 떨어진 지점에서 발견된 남조 시기 전실묘를 원 상태 그대로 옮겨온 것이라고 했고, 내부 벽화의 사진을 전시해놓았는데 이 벽화를 ‘석각’이라고 표현한 듯 했다. 남조 시기 귀족무덤(?)으로 사신도(四神圖)가 없다는 점과 내부 유물의 차이점을 제외하면 ‘무령왕릉’의 내부 모습과 쌍둥이처럼 동일했다. ‘나중에 또 오라’는 뜻인 듯, 마침 카메라가 작동하지 않는 것이 너무나 아쉬웠다.


광릉왕묘에서 나오자 아직 오후 1시도 되지 않았지만, 쏟아지는 비에다 장비 문제(?)가 속을 썩여 지쳐있는 상태여서 택시부터 잡아타고 일단 양주의 주요 관광거리인 동관가(둥관졔, 東關街)로 가서 식사를 했다. 양주는 볶음밥(炒飯)으로 유명한데, 필자는 동관가의 현지식당에서 새우완탕과 함께 양저우차오판(揚州炒飯)으로 점심식사를 마쳤다. 다행히 스마트폰은 배터리 충전을 시작하자 다시 작동했다.



양저우차오판과 완탕 (2016. 7)


점심식사 후 근처 청대(淸代) 정원 등 거리를 돌아본 후 필자는 양주에서의 마지막 일정으로 계획한 고운하(古運河)로 향했다. 고운하는 대운하 수로 중에서도 가장 이른 시기의 인공 수로를 뜻한다. 장맛비로 인해 운하 일부는 범람 직전이었다.



                                                                                양주 고운하 일부 (2016. 7)



                                                                             양주 고운하 일부 (2016. 7)



남경: 백제 사신관을 찾아
둘째날 저녁 남경으로 이동한 필자는 셋째날 오전 남조 시대 건강성의 백제 사신을 위한 객관(客館)이 소재했을 것으로 추정되는 곳을 답사하고자 숙소를 나왔다.


백제 사신의 거처는 고구려, 유연, 토번, 고차(高車)의 사신들의 거처와 같은 곳에 있었으며 ‘집아관(集雅館)’이라고 불렸는데, 그 위치에 대한 추정은 우리 학계에서는 조윤재(2013)의 연구가 유일하다. 이 연구에서는 남조 시대 백제 사신관의 위치를 “지금의 남경시 龍蟠中路와 太平巷 동측이 교차하는 어느 지점으로 비정이 가능할”(조윤재 2013; p.42) 것이라고 서술하고 있어 필자는 이 지점을 찾고자 했다.


현재 남경시의 롱판중루(龍蟠中路)는 건강성의 옛 궁성을 깔고 앉은 총통부 및 남경육조박물관과 동쪽으로 조금 떨어진 명대 황궁(조천궁) 사이를 흐르는 진회하 동부 수로 서쪽 연안을 남북으로 관통하며, 타이핑샹(太平巷)은 도심 남부에서 동서를 관통하는 좁은 거리이다. 두 거리의 교차지점은 도심 남부 진회하 서안의 한 지점으로 아래 사진과 같은 모습이다. ‘집아관’의 정확한 지점은 알 수 없이 대략 추정할 뿐이고 옛 모습 또한 전혀 찾아볼 수 없지만 직접 찾아와본 것에 의의를 두기로 했다. ‘대륙백제’가 있었다면 집아관은 매우 중요한 정치외교적 장소였음이 틀림없다.



남경 롱판중루 표지 (2016. 7)



남경 타이핑샹 중단지점. 타이핑샹 동부는 진회하 서안을 앞두고 사진과 같이 끊겨 있다. (2016. 7)




                       남경의 진회하 수로 서안(사진 오른쪽)이 롱판중루와 타이핑샹의 교차지점으로 집아관의 추정 위치 (2016. 7)


남경역에서 탈 기차 시간이 넉넉하지는 않지만 아직 남아있어 2년 만에 남경육조박물관을 다시 찾기로 했다. 전시 구성은 2년 전과 대동소이했지만, 지하와 1층만 있던 당시와는 달리 이제는 3층까지 전시실이 구비되어 있었다. 3층에서는 남조 시대 벽돌무덤의 실물 크기 내부 모형을 보게 되어 양주 광릉왕묘 옆의 벽돌무덤 사진을 찍지 못한 아쉬움을 달랠 수 있었다.



                                                              남조시대 벽돌무덤 모형 (남경육조박물관, 2016. 7)



단양(丹陽): 남제(南齊)의 황실묘 석각(石刻) 답사
오후 1시 열차를 타고 단양으로 향한다. 한국의 단양과 한자까지 같은 지명을 가진 중국 단양은 남경 근교 진강(전장, 鎭江)시에 속해 있는 지급시(地級市)로 남경역에서 고속철도로 30분도 걸리지 않는다. ‘삼국지’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라면 감로사(甘露寺), 철옹성(鐵甕城) 등 오나라 유적이 많은 진강 도심으로 갔겠지만, 필자의 관심은 5~6세기의 남조이다. 남경에서 단양을 거쳐 소주와 상해로 통하는 고속철도는 남제 시대의 ‘남서주(南徐州)’를 그대로 관통한다. <남제서> 지리지에는 남서주에 ‘청하현(淸河縣)’이 있다고 했는데, 같은 책 열전 백제 부분에는 동성왕의 ‘청하태수’ 임명 기록이 있다. 


여전히 흐리고 비가 오가는 날씨 속에 단양역에서 택시를 잡아타고 필자가 검색해 온 소씨종사(蕭氏宗祠)와 석각의 목록을 내밀었다. 이들은 농촌 지역이 많은 단양시 전역에 흩어져 있다.


현지 지리에 정통할 것을 기대했는데 택시 기사는 메모를 보고 고개를 갸우뚱한다. 모두 처음 가보는 곳이라는 것이다. 일단 필자의 중국 지도앱과 택시의 내비게이션을 총동원하여 소씨종사부터 찾아갔다.


소씨(蕭氏)는 남제(南齊) 왕조(479~502)와 뒤를 이은 양(梁) 왕조(502~557)의 왕족이며, 본래 회수 이북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지역에 거주하던 귀족 집안으로 서진(西晉)의 멸망(316) 이후 남하했다. 필자의 사극에서는 ‘대륙백제’와 밀접한 관련이 있는 남조 왕조의 정치적 상황 또한 묘사될 것이고 이들 ‘소씨’ 왕실 인물들이 등장하지 않을 수 없다.


택시기사가 현지 주민에 길을 묻기도 하면서 소씨종사에 도착했다. 청대(淸代)에 세워진 소씨종사는 유명한 관광지가 아니기도 하고 한 가문의 사당이기도 해서 주변은 매우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고, 사당의 문은 잠겨 있었다. 평소에 오는 사람이 없어서인지 마을 주민 몇 분이 신기한 듯 나와서 택시기사와 이야기를 나눈다. 사투리 이상으로 표준 중국어와 발음이 완전히 다른 오어(吳語)로 이야기하는 듯 전혀 알아들을 수 없다.



                                                                          소씨종사 전경 (2016. 7)




소씨종사 안내판 (2016. 7)


마을 주민 한 분이 표준어로 필자에게 어디 사람이냐고 묻는다. 한국인이라고 했더니 혹시 ‘소씨’냐고 물어 아니라고 했다. 그러자 그는 문을 열 사람이 마을에 있는데 불러 내부를 보겠냐고 물었다. 필자는 잠깐 고민했는데 전문 연구자나 소씨 일족이라면 모를까, 남의 가문 사당에 막 들어간다는 것이 저어되었기 때문이다. 결국 내부를 보지 않겠다고 하고, 내부가 어떤 모습인지를 물었다. 그는 내부에는 역대 소씨 가문 인물들의 위패와 초상 등이 있다고 했다. 또 이 사당에는 매년 ‘세계 각지의’ 소씨들이 와 제사를 지낸다고도 했다.


필자의 사극 속 소씨 캐릭터들에게 먼발치서 ‘손인사’를 한 셈 치는 것에 만족하며 마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하고 소씨종사를 떠났다. 이때까지만 해도 곳곳에 폐허로 남아 산재한 석각(石刻)들을 찾는 것이 그렇게까지 힘들 줄은 아직 알지 못했다.


남경, 단양 등에 산재해 있는 ‘남조석각(南朝石刻)’이란 남조 시대 왕릉이나 왕족 묘 앞에 세운 기린(麒麟)이나 천록(天禄) 등의 상상 속 동물 모양 석상을 말한다. 단양에는 특히 남제(南齊) 시대의 석각들이 집중되어 있다. 그러나 단양 지역의 석각들은 논밭 속에 가려져 있는 경우가 많아 택시 기사도 우왕좌왕하거나 현지 주민에게 물어보기를 반복해야 했다. 결국 필자는 검색해 온 다섯 곳의 석각 중에서 다음 날까지 포함해 두 곳에만 들를 수 있었다. 


남제 왕조와 양 왕조의 석각들 중 가장 보존 상태가 좋은 석각은 황제릉의 것이 아니라 양 무제(梁 武帝) 소연(蕭衍: 464~549, 재위 502~549)의 아버지인 소순지(蕭順之)의 묘 석각이다. 아래 ‘카메오 열전’에서 조명할 소순지는 사후 아들이 폭군을 처단하는 반란으로 황제가 된 덕분에 양 문제(梁 文帝)로 추존되어 그의 묘도 황제릉에 준하는 양식으로 조성되어 있다. 셋째 날 단양에서의 유일한 답사 성과인 이 석각도 키 큰 옥수수밭과 숲 사이에 숨어 있어 하마터면 그냥 지나칠 뻔 했다.



단양 소순지(추존 양 문제)묘 석각 일부 (2016. 7)



단양 소순지(추존 양 문제)묘 석각 일부 (2016. 7)


답사의 마지막 넷째 날, 상해로 돌아가기 전 오전 시간을 이용하여 남제 무제 소색(蕭賾; 440~493, 재위 482~493)의 능 석각을 찾아가기로 했다. 남제 무제는 23년 밖에 되지 않는 남제 역사에서 11년을 재위하며 전성기를 이끌었고, 490년의 일로 기록된 백제-북위 전쟁 역시 그의 재위 동안 일어난 일이다.


이 날 만난 택시기사는 길눈이 좀 더 밝은 듯 했으나 여전히 석각을 정확히 찾기는 쉽지 않았다. 지도앱에 표시된 장소와는 또 달라서 알아들을 수 없는 현지어로 택시기사가 주민들에게 계속 물어보기는 했지만, 일단 빗속에서 석각을 찾아내니 후련했다. 경안릉(景安陵)이라 불리는 남제 무제릉 석각은 공사장 흙자갈  더미 옆 논바닥에 2기가 있었는데, 논에 물이 차 곧 잠길 듯 위태로워보였다. 우여곡절 끝에 장맛비 속 답사를 끝내고 귀로에 올랐다. 



단양 남제 무제릉 석각 일부 (2016. 7)




단양 남제 무제릉 석각 (2016. 7)



남제 무제릉 석각 표지 (2016. 7)



* 카메오 열전 (2): 남제(南齊) 소순지(蕭順之, 생몰 연대 불명)
소순지는 남제 왕조를 창건한 소도성의 친족이다. 그는 왕조 창건 과정에서의 혁혁한 공에 비해서는 보잘 것 없는 단양윤(丹陽尹)이라는 지방 벼슬을 받고 조용히 살았는데, 일설에는 소도성이 그의 능력을 경계한 탓이라고도 한다(이도학 외 2014). 반면 그의 아들 소의와 소연은 일찍부터 남제의 주요 귀족들과 교류하며 문무(文武)에 재능을 드러내었고 소연이 502년 결국 새 왕조를 개창하게 된다.



* 카메오 열전 (3): 보디다르마(Bodhidharma, 達摩, ? ~ 536)
보디다르마(이하 달마)는 동아시아 불교사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도 출신 고승(高僧)이며, 선종(禪宗)의 비조(鼻祖)로 알려져 있다. 6세기 초에 중국으로 건너온 듯하며, 일설에는 양 왕조의 창건자이자 전성기를 이끈 무제 소연이 불교에 심취하여 달마에게 찾아왔지만 그는 양 무제가 불도(佛道)의 본질보다는 겉치레만을 중시하는 것에 실망하여 비판한 뒤 떠났고, 이후 당시 북위 영토였던 숭산(嵩山)으로 가 소림사(少林寺)에서 불도를 닦고 선종을 창시했다고 전한다. 필자의 사극에서 달마는 484년 젊은 시절에 백제에 입국하여 신소도국 천군에게 찾아와 논쟁을 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남경육조박물관의 달마와 남조 불교 해설, 2016. 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