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 (蓋鹵王, ? ~ 475, 왕위 455~475): 백제 제21대(<삼국사기> 기준) 왕. 비유왕(毗有王)
의 장자.
곤지 (昆支, ? ~ 477): 개로왕의 동생 또는 아들, 백제 좌현왕(左賢王)이자 말년의 내신좌평.
왜국 웅략왕(<일본서기>의 웅략천황)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백제-고구려의 100년 전쟁과 개로왕
<삼국사기>의 개로왕조는 개로왕이 고구려와의 전쟁만을 위해 살아온 인물이라는 뉘앙스를 풍긴다. 이 기록에서 개로왕은 즉위 이후 아무런 기록이 없다가 재위 14년(468)의 일식 기사를 시작으로 15년(469)년에는 고구려 남부 변경을 공격하고, 쌍현성을 수리하거나 북한산성의 방비를 강화하는 등 전쟁 기사로 점철되어 있다. 이 전쟁에는 외교전도 포함되는데, 15년조의 바로 다음 기록이 재위 18년(472)으로서 중국 남북조 시대 북쪽의 패자(覇者)인 타브가치족(拓拔鮮卑) 왕조 북위(北魏)에 고구려를 협공하자는 국서를 보낸 일이다. 북위에 납작 엎드려 칭신(稱臣)하며 공손하기 짝이 없는 문투의 이 국서는 한문 문장만으로 평가해도 상당한 명문으로 알려져 있는데, 주류와 재야를 막론하고 여러 학자들이 소개하고 분석한 유명한 기록이므로 여기서는 자세하게 설명하기보다는 개로왕의 상황 인식을 알 수 있는 부분을 중심으로 살펴보겠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조 중
臣與高句麗 源出扶餘 先世之時 篤崇舊款 其祖釗 輕廢鄰好 親率士衆 凌踐臣境 臣祖須 整旅電邁 應機馳擊 矢石暫交 梟斬釗首...
신과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에서 나왔으므로 선조 시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게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친히 병사를 거느리고 우리 국경을 침범하였습니다. 신의 조상 수(須, 근구수왕)가 병사를 정비하여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하였고, 잠시의 싸움에서 쇠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개로왕은 고구려와 백제가 부여라는 한 뿌리에서 나왔으나 원수가 된 시초를 100년 전 고국원왕-근초고왕 전쟁(371)으로 적시하고 있다. 고구려의 잘못이 먼저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효시’까지 했는지는 과장된 기록일 수 있으나 고국원왕을 전사시켰다는 점을 부각시켜 자부심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문투는 곧 이 또한 옛날 일로서 강대해진 고구려가 백제를 핍박하고 있으니 군사를 보내어 구원해달라는 호소로 바뀐다.
배신당한 정성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조 중
構怨連禍 三十餘載 財殫力竭 轉自孱踧 若天慈曲矜 遠及無外 速遣一將 來救臣國...
원한을 맺고 화가 이어진 지 30여 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가 점점 쇠약해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마음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어 우리나라를 구해 주십시오...
30여 년 동안의 원한과 화를 이야기하는 것으로 보아 고구려와의 갈등과 군사충돌이 이미 선대왕인 비유왕 때로부터 계속되고 이것이 국력 피폐로 이어지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이후의 국서 내용은 고구려의 내정이 혼란하여 공격하기 좋은 때라는 것과 고구려의 전방위 외교를 언급하여 북위의 경계심을 부추기는 내용, 고구려에 막혀 죽은 백제로 가던 북위 사신으로 추정되는 시신을 언급하고 증거물까지 보내 고구려의 흉포함을 부각시키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이러한 개로왕의 정성에도 불구하고 북위의 답서는 시원치 않은 내용이었다. 북위 효문제(재위 471~499)의 답서 또한 <삼국사기>에 실려 있는데, 장문이지만 결국 요약하면 다음과 같은 내용이다.
‘먼 길 오느라 수고했다. 백제 사신들은 우리의 강대함과 풍요함을 잘 보았고 우리 또한 멀리서 찾아준 것에 고맙다. 그런데 너희들이 주장하는 고구려에 살해당한 우리 사신의 증거물이라는 것은 우리 것이 아닌 것 같다. 혹시 (사신 실종이) 고구려의 짓일 수도 있으니 그에 대비한 고구려 공격 계획 정도를 함께 보내기는 하겠다. 그런데 기실 고구려가 우리에게 딱히 나쁜 짓을 한 것도 없으니 지금 같이 공격하기는 곤란한 것 같다.’
효문제(사실은 수렴청정하고 있는 풍태후)는 소안이라는 관료를 돌아가는 백제 사신들과 함께 보냈는데, 이들은 고구려를 통과하다가 장수왕에게 저지당하고 만다. 북위는 이에 대해 고구려를 ‘꾸짖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결국 현실적으로 강대한 고구려의 힘을 어찌하지 못한 것이고, 이후에도 백제에 해로를 통해 사신을 파견하는데 이마저도 풍랑 때문에 실패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개로왕은 이후에도 북위에 여러 번 협공을 요청한 것으로 보이지만 북위는 예의 뜨뜻미지근한 태도를 유지했고 그는 결국 사신 파견을 중단한다.
<삼국사기> 개로왕 18년조 중
... 王以麗人屢犯邊鄙 上表乞師於魏 不從 王怨之 遂絶朝貢
임금은 고구려가 자주 변경을 침범한다 하여 위나라에 표문을 올려 병사를 요청하였으나 들어주지 않았다. 임금이 이를 원망하여 마침내 조공을 중단하였다.
퍼즐 조각 찾기
<삼국사기>에서 개로왕에 대한 다음 기록은 재위 21년(475)년 장수왕의 한성 침공과 개로왕의 죽음, 그리고 시기가 특정되지 않은, 그 이전 고구려의 ‘간첩’ 승려 도림의 왕권 강화책 (궁궐 수축, 제방 구축) 간언과 개로왕의 실행, 그리고 패배와 죽음을 목전에 둔 후회와 ‘플랜 B'(문주에게 왕위 계승 및 신라의 구원을 요청)의 실행이다. 이와 같이 개로왕에 대한 <삼국사기>의 기록은 마치 고구려 관련 기록만 선별해놓은 것 같다는 느낌을 주는데, <일본서기>나 <송서>에서 다른 퍼즐조각을 찾을 수 있다. 물론 이들 조각들도 고구려와 깊은 관련을 가지고는 있지만 좀 더 입체적으로 개로왕과 그의 시대를 바라볼 수 있는 기록들이며, 다음 편에서 살펴보겠지만 이 조각들을 통해 5세기 중후반 백제사와 왜국사의 열쇠가 되는, 개로왕 사후 백제 내전기(475~479) 왕실의 ’큰어른‘ 곤지가 나타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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