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로왕 (蓋鹵王, ? ~ 475, 왕위 455~475): 백제 제21대(<삼국사기> 기준) 왕. 비유왕(毗有王)
의 장자.
곤지 (昆支, ? ~ 477): 개로왕의 동생 또는 아들, 백제 좌현왕(左賢王)이자 말년의 내신좌평.
왜국 웅략왕(<일본서기>의 웅략천황)으로 추정하는 설도 있다.
무령왕과 출생의 비밀
夏四月。百濟加須利君〈盖鹵王也。〉飛聞池津媛之所燔殺〈適稽女郞也。〉而籌議曰。昔貢女人爲釆女。而旣無禮。失我國名。自今以後不合貢女。乃告其弟軍君〈崑攴君也〉曰。汝宜往日本以事天皇。軍君對曰。上君之命不可奉違。願賜君婦而後奉遺。加須利君則以孕婦。旣嫁與軍君曰。我之孕婦旣當産月。若於路産。冀載一船。隨至何處速令送國。遂與辭訣奉遣於朝。
여름 4월, 백제 가수리군(개로왕)이 지진원(적계여랑: 여인 이름)이 불타죽었다는 말을 전해 듣고 헤아리고 논의하며 말하였다. “여인을 항상 바쳐왔거늘 유감이다, (왜왕이) 그리 무례하니 우리나라의 명예가 실추된다. 이제는 여인을 바치지 않겠다.” 그리고는 그의 동생 군군(곤지)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너는 마땅히 일본(5세기의 왜국)으로 가 천황(5세기의 왜왕)을 섬기거라.” 군군이 대답하여 말하였다. “임금의 명이시니 어길 수 없습니다. 원컨대 임금의 부인을 내려주신다면 받들겠습니다.” 개로왕이 곧 임신한 부인을 곤지와 결혼하게 하고 말하였다. ”내 아내가 산달이 가까웠으니, 가는 길에 출산한다면 원하건대 같은 배를 태워 어디에서든지 속히 우리나라로 돌려보내도록 하여라.“ (곤지가) 드디어 작별인사를 하고 왜국으로 떠났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1)조
六月丙戌朔。孕婦果如加須利君言。於筑紫各羅嶋産兒。仍名此兒曰嶋君。於是軍君卽以一船送嶋君於國。是爲武寧王。百濟人呼此嶋曰主嶋也。
6월 병술 초하루에 그 부인은 과연 개로왕이 말한 대로 축자(쓰쿠시)의 각라도(가카라노시마)에서 아이를 낳았다. 그래서 그 아이의 이름을 도군(시마키시)이라고 하였다. 곤지가 즉시 배 한 척으로 도군을 돌려보내니 그를 무령왕이라고 이른다. 백제인들이 그 섬을 일러 주도라고 불렀다.
-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461)조
<일본서기(日本書紀)> 웅략천황(雄略天皇)조의 이 기록은 곤지의 왜국행과 무령왕 사마의 출생을 상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개로왕이 임신한 자신의 아내를 동생 곤지와 결혼시켜 보내는 과정이 해괴하다 하여 이 결혼 묘사 부분은 웅략천황조의 앞부분(즉위 ~ 4년)처럼 신빙성이 없는 기록으로 치부되기도 한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웅략천황 5년 조의 무령왕의 출생연도가 무령왕릉 지석의 기록과 일치하고(523년 사망 시 62세), 별안간 왜국 국내가 아닌 백제의 상황 묘사를, 그것도 왕통에 관련된 사건을 보여주는 의도가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무시할 수 없는 기록이기도 하다.
드라마의 재구성: 개로왕, 곤지와 ‘그녀’의 관계
개로왕이 자신의 왕후 또는 후궁을, 그것도 임신한 상태로 곤지에게 보내어 왜국으로 데려가게 한 사건은 유교적 관념이나 현대의 일반적인 윤리 개념으로는 이해하기 힘들고 망측하기까지 할 수 있다. 하지만 북방 유목민족과 그 계열 중원 국가들, 그리고 초기 고구려와 몽골, 심지어는 20세기 중반의 일본까지 형사취수제(兄死娶嫂制: 형이 죽으면 동생이 형의 아내를 취함-전쟁과 급사의 위험이 상존하는 이동 생활에서 가족의 생존을 유지하려는 이유라고 함)의 관습이 비일비재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한다(김운회 2010). 또 이 기록으로부터 개로왕이 곤지를 보내면서 아내까지 보내야 할 급변사태나 위험에 직면하는 상황이 있었다고 추리할 수 있는데 고구려와의 갈등과 위협이 그 원인일 가능성이 크다고 한다(김운회 2010). 실제로 <삼국사기>의 개로왕 기록이 고구려와의 대립으로 일관되어 있다는 것과 개로왕의 대 북위 국서(472)에서 고구려의 ‘30년 동안의 침탈’을 적시하고 있다는 점은 이런 추정에 근거를 마련해준다. 즉 고구려 견제를 위한 남북조 국가들과의 외교 전략이 실패할 경우 예상되는 전화(戰火)에 대비한 백제 왕실의 장기적 ‘플랜 B'는 왜 열도의 부여계 세력과 곤지, 그리고 곧 태어날 사마(무령왕)였던 셈이다.
한편 <일본서기> 웅략천황 5년 조 기록이 사실이라고 가정하고 상상력을 발휘해본다면 무령왕의 아버지가 누구인지부터 아리송하게 되는 ‘출생의 비밀’ 문제가 발생한다. 개로왕이 자신의 왕후 또는 후궁을 위험에서 피하도록 곤지에게 잠시 맡긴 정도라면 무령왕의 아버지는 개로왕이 맞다. 그런데 개로왕이 자신의 왕후 또는 후궁과 곤지가 예사 관계가 아니라는 것을 알고 그 여인을 ‘내치는’ 것이라면 무령왕의 아버지가 곤지일 수도 있다. 또 시끌벅적한 ‘막장드라마’가 아니라 비장한 ‘비극적 멜로’를 상정한다면 개로왕이 자신이 연모하는 여인을 왕후 혹은 후궁으로 들였는데 알고 보니 그녀가 이미 곤지의 연인이었고 아이까지 가지고 있어서 곤지를 왜로 보내면서 ‘그녀’도 ‘함께 보내줘야 하는’ 상황이었을 수도 있다. 이때에도 무령왕의 아버지는 곤지가 되지만, 반면에 개로왕이 실제 아버지일 수도 있는데 이것은 곤지와 ‘그녀’에게 더욱 비극적인 상황일 것이다. 또한 461년 태어난 사마는 나중에 왕위에 오르게 되므로 ‘출생의 비밀’ 문제는 의외로 권력 구도까지 흔들 수 있는 중대한 사안일 수도 있는데, 아마도 무령왕 자신은 주변의 분분한 수군거림을 어찌 되었든 자신이 ‘부여의 아들’이나 ‘백제의 아들’임을 강조하며 돌파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어쨌든 <일본서기>의 웅략천황 5년 조 이후 기록은 소위 ‘웅략천황’의 4년 조까지의 구제 불가능한 악행 기록들과는 달리, 하필 상세한 백제 기록 이후로 정상적인 기록으로 변하는데 이는 곤지의 도왜(渡倭)와 관련하여 의미심장한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다. 따라서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는 설이 웅략천황 5년 조 이후의 웅략왕(5세기에는 천황 명칭이 있을 수 없다)이 곧 곤지라는 것인데 공교롭게도 필자가 어떤 역사해설서나 논문보다도 수긍했고 본 기획을 위해 많이 참조하게 되는 두 저자의 책 세 권이 모두 이 설을 강력하게 주장하고 있다. 다음 열전 포스팅에서는 ‘웅략왕=곤지’ 설을 살펴보고, 이와 관련하여 곤지와 함께 왜국으로 건너간 개로왕의 부인이라는 여인에 대해 추리하며, 덧붙여 ‘도미부인’ 이야기를 분석할 것이다.
* (잡설) 사극 유감: 백제 사극 최대의 걸림돌 - <일본서기>와 현대 한일 관계
지금까지 방영된 몇몇 백제 관련 TV 사극에서 ‘왜’에 대한 묘사나 관련된 등장인물들을 꼽아보자면 다음과 같다.
1. <서동요>(2005, SBS, 감독 이병훈, 극본 김영현): 백제 위덕왕(재위 554~598)과 법왕(재위 598~600) 시대를 배경으로 하고 있는데, 왜와 관련된 사건과 사실들은 소략하며 모두 대사로 처리된다.
2. <근초고왕>(2010, KBS1, 윤창범, 김영조 연출, 극본 정성희, 유숭열): <일본서기>의 ‘신공황후’(神功皇后, 진구황후)가 아예 ‘진구’라는 이름으로 등장하여 ‘우수한 백제 문화를 배우기 위해’ 야마대국의 촌구석에서 한성까지 오는 총명한 왜국 여인으로 설정되어 있으며, 극 말미에는 근초고왕에게서 칠지도까지 하사받는다.
- ‘신공황후’는 원래 일본 왕실 계보의 공백을 채우기 위해 창조된, 일본 학계 일부에서도 인정하는 <일본서기>의 가공인물이다, 신공황후 캐릭터의 참고 모델은 주로 3세기 중원의 삼국시대 위(221~263) 왕조에 사신을 보낸 야마대국 여왕 히미코(卑弥呼, ?~247)와 7세기에 백제부흥군 지원을 위해 2만 7천의 대군을 파견하는 여왕 제명천황(齊明天皇, 사이메이천황, 재위 655~661) 등이다. 특히 신공황후 조에 기록된 한반도 남부 공략과 소위 ‘임나일본부’는 4세기 중반 백제왕의 기록을 가져다쓴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데, 우리 학계는 주로 이 정벌의 주체가 근초고왕(재위 346~375)이라고 보나, 김상(2011)은 금강 유역에 수도를 둔 삼한 진왕(辰王) 정부의 왕으로서 비류백제왕 여구(餘句)라고 본다. 다만 사극 <근초고왕>은 ‘근초고왕=여구’라는 통설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3. <계백>(2011. MBC. 한희 제작, 정형수 극본): 640년대 초 의자왕과의 권력 투쟁에서 패한 사택왕후와 그녀의 아들 교기는 무왕에 의해 용서받고 떠나는데 극에서는 행선지를 밝히지 않고 사라진다.
- 사택왕후와 교기는 이즈음에 바로 <일본서기>에 등장하게 되는데 이후에는 <일본서기>에서 시시콜콜히 기록되다가 돌연 사라지고, 갑자기 ‘보황녀’(寶皇女)와 ‘중대형’(中大兄)이라는 인물이 출현하여 권력을 장악하고 개혁정책을 편다(645, 다이카 개신(大化改新)). ‘보황녀’와 ‘중대형’이 과연 누구를 말하는지 의미심장한 대목이라고 할 수 있다(김상 2011). 한편 보황녀는 나중에 왕위에 오르는데 바로 2에서 소개한 제명천황(齊明天皇, 사이메이천황, 재위 655~661)이다.
4. <수백향>(2013, MBC. 방영 중, 김진민 기획, 황진영 극본): 본 기획 ‘열전’ 카테고리의 두 번째 포스팅에서 소개한 대로 사극 <수백향>의 주인공 수백향(手白香)은 본디 왜국 계체왕의 왕비로 <일본서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극중의 수백향은 한자 이름까지 수백향(守百香)으로 바뀌어 있고, 실제 스토리의 전개에서 왜국의 ‘o’자도 나오지 않으며, 가짜 공주 노릇을 하는 의붓동생을 위해 공주 신분을 숨기고 백제의 ’간첩‘으로 활동하고, 왜국이 아니라 섬진강 유역의 소국 ’기문‘으로 파견되기도 하는 등 완전히 다른 인물의 다른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사극에서 보듯이 우리나라의 삼국시대 사극에서 왜국의 존재는 항상 무시되거나, 왜곡되거나, 숨기거나, 완전히 변형되는 운명을 피할 수 없다. 마치 검열이라도 받는 듯한 뉘앙스를 풍기는데, 아직 ‘일제시대’(?)라도 되서 그런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수백향>의 경우 스토리가 어떤 방향으로 변형되었는지 역추적하면 원래의 이야기 전개를 쉽게 알 수 있을 듯한데, 마침 일본 아베 정권의 급속한 우경화로 대일 감정이 극도로 나빠진 상황에서 ‘왜국 왕비’ 이야기를 대놓고 그린다면 드라마 자체의 운명을 알 수 없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즉 시청자들의 ‘대일 감정’과 소위 한일 관계를 고려한다는 취지에서 백제 사극에서 백제사의 절반까지 차지할 수 있는 ‘왜국’을 정면으로 다루지 못하는 듯한데, 그렇게 사려 깊은 태도로 한국-몽골 관계와 역사적 사실에 대한 왜곡으로 점철된 <기황후>는 어떻게 기획하게 되었는지 묻고 싶다. 힘센 ‘선진국’ 일본을 다루는 드라마는 조심스럽게 접근해야 하고, 소위 ‘야만족’(원한국인의 피는 대부분 이 ‘야만족’의 피다)으로서 고려를 ‘핍박’했으며 (엄청난 왜곡이다) ‘못사는’(최근 몽골의 급속한 경제성장을 모르는 소치다) 몽골을 다루는 드라마는 ‘깽판 쳐도’ 좋다는 것인가?
백제의 멸망(660)과 <일본서기>의 편찬(720)을 기점으로 고대 왜국사는 일본은 물론 한국에서도 ‘일본의 역사’로 교육되어왔다고 본다. <일본서기>는 일본이 다른 세계와 어떤 관계도 없이 단일민족임은 물론 독립적으로 최고의 위치에 있는 나라라고 설정해놓고, 소위 ‘만세일계(萬世一係)’의 왕실 계보를 만들기 위해 왜 열도와 한반도의 고대사를 그 기준대로 치밀하게 짜 맞추고, 재배열하며, 때로는 연대를 무시한 기존 역사 기록의 짜깁기와 인물 창작도 서슴치 않는 ‘문학 작품’이라고 할 수 있다. 무서운 것은 이 책이 1,300년이나 되는 세월 동안 일본인의 의식과 정신세계에 지속적으로 막대한 영향을 끼쳐왔다는 점이다. 말하자면 일본인의 ‘구약 성경’이나 다름없는 셈인데, 돌아가야 할 ‘가나안 땅’에 대응될 수 있는 곳은 물론 한반도로서 소위 정한론(征韓論)과 일본 우익의 사상적 기반이 되어 왔다. 아베 정권의 폭주를 초래한 배경은 그 뿌리부터 깊고 너무 오래되어 일본인 스스로들부터 쉽게 바꾸기도 힘들 것이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런 맥락에서 필자는 ‘한-중-일 통합역사교과서’와 같은 시도는 그 취지에는 공감하나 현실성이 거의 없다고 보는데 오히려 현대사는 어떨지 몰라도 고대사의 인식에 있어서 더욱 첨예하게들 대립할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서기>에서의 고대 왜국사는 ‘일본 최고’와 ‘만세일계’의 서술 원칙에 따라 전면적으로 재구성되어 있는데, 이를 해체하면 왜국사의 본모습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추정에 있어 의견들이 분분하여 백가쟁명(百家爭鳴)하기는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 작업을 해온 것도 사실이다. 그들에 따르면 그 본모습은 ‘열도로 건너간 부여인, 고구려인, 신라인들의 투쟁과 영욕의 역사’일 가능성이 많아 보인다. 이런 개념전환은 학계와 교육계는 물론 ‘사극’에서도 7세기 이전 고대 왜국사를 한국사의 일부로 당당히 다룰 수 있어야 한다는 잠정적인 결론으로 이어질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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