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향번사희 (草香幡梭姬, 橘姬, ?~?): <일본서기>에 기록된 웅략왕(재위 457~480)의 왕비. 원래 이름이 ‘초향번사희’이고 다른
이름이 ‘귤희’라고 되어 있으나, 명칭에서 풍기는 신분상 분위기로 볼 때 ‘귤희’가 본래 이름이고 ‘초향번사희’가 존칭인 다른
이름이라는 것이 더 설득력이 있다(김상 2011). 5세기 초 ‘인덕천황’(인덕왕)의 딸로 ‘번사희’라 불리며 왕자 ‘대초향’(大草香)
의 누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5세기 중반에 웅략왕이 왕비로 세우기에는 나이가 너무 많아 합리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인덕왕
의 딸과 동일인물이라고 볼 수 없어 출신을 알 수 없고, 네 왕비 중 유일하게 자식이 없는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나, 이 때문에
더욱 그녀가 백제 출신이며 ‘곤지=웅략왕’일 경우 곤지의 도왜(渡倭) 때 그의 아내로 따라간 ‘개로왕의 부인’이고 무령왕의 어
머니일 가능성을 점쳐볼 수 있다.
도미부인 (都彌夫人, ?~?): <삼국사기> 열전 ‘도미전(都彌傳)’에 기록된 ‘도미’의 부인. ‘개루왕’ (백제의 4대 임금으로 기록됨)
이 도미의 부인이 미모가 출중하다는 말을 듣고 도미에게 그 부인의 정절을 시험하는 내기를 건다. 도미의 부인은 수청을 요구
하며 집까지 찾아온 왕에게 몸종을 대신 꾸며 들여 첫 번째 위기를 넘기고, 이에 분노한 왕은 도미의 두 눈을 멀게 만들고 나룻
배를 태워 쫓아내는 벌을 내린다. 이를 슬퍼하던 도미부인은 자신을 다시 찾아온 왕을 옷을 갈아입겠다며 기다리게 한 뒤 그
길로 도망쳐 남편 도미를 다시 만났고, 이후 고구려의 산산(蒜山)이라는 곳으로 가 도미와 함께 평범하게 살다가 일생을 마쳤
다고 하는 이야기이다. ‘개루왕’이 재위한 2세기는 백제의 왕권이 강하지 못하고 영토도 작아 고구려와 접하지 못한 시기로, <
삼국사기> 개로왕 조에 개로왕이 ‘근개루’라고도 불린다는 점, 왕권 강화책을 시도했고 고구려와 접하여 갈등을 빚은 시기라는
점 때문에 이 이야기는 개로왕에 대한 것이라는 게 통설이다(이도학 2010).
무령왕의 어머니에 대하여
김상(2011)은 ‘곤지=웅략왕’이라는 전제 하에, <일본서기> 웅략왕 조에 등장하는 웅략왕의 네 왕비와 그 소생의 왕자들을 다음과 같이 정리하고 있다.
왕비(초향번사희) - 6자 사마 (斯麻, 즉 무령왕, <일본서기> 혈통 기록 탈락)
원비(한원, 韓媛) - 2자 말다 (末多, 곧 모대, 동성왕, <일본서기> 혈통 기록 탈락), 3자 백발(白髮, 왜국 청령왕, 웅략왕의 다음 왕), 5자
사아(斯我, 즉 ‘계미년 동경’을 받은 男弟王, 왜국 계체왕)
차비(치족희, 雉足姬) - 1자 반성왕자, 4자 성천왕자
차차비(동녀군, 童女君) - 아들이 없음
여기에 등장하는 웅략왕의 왕비들 소생의 아들들 중 무려 네 명이 백제의 진왕(辰王, 대왕)이나 왜왕이 된다(김상 2011). 말다(동성왕)와 사마(斯麻, 무령왕)는 웅략왕의 아들들 기록에서 빠져 있는데 왜왕이 아니라 백제왕이 되었기 때문이다.
김상(2011)은 <삼국사기>의 서술 원칙은 ‘한성백제’에 대한 기록만을 싣고 ‘비류백제’(진왕백제(辰王百濟): 금강유역에 중심지를 두고 한성백제 등 중소국들을 거느린 맹주국, 즉 4세기 말 ~ 5세기 초 광개토태왕 전쟁 이후 열도로 망명한 한(韓), 이후 진왕의 맹주권과 왕권은 한성백제가 단계적으로 가져가게 된다)에 대한 내용은 모조리 탈락시키는 것이고, <일본서기>는 ‘비류백제’에 대한 내용만을 싣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한성백제’의 기록 중 ‘비류백제’와 연관된 내용은 별도로 싣기도 한다고 주장한다. 이 설을 따른다면 <일본서기>에서 왕자로서 사마와 말다에 대한 기록은 탈락하는 것이 당연하나, 둘 모두 왜 출생(사마)이거나 왜국 체류 동안 구축한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므로(말다) <일본서기>에 ‘백제왕’의 기록으로 등장할 수 있는 것이다.
웅략왕의 왕비인 귤희를 ‘개로왕의 부인’이자 461년 이후 ‘곤지의 부인’이며 무령왕의 어머니로 추리할 수 있는 것은 <일본서기>에서 모호한 그녀의 출신 때문이다. 초향번사희는 단지 ‘인덕왕의 딸’로 기록되어 있으나 인덕은 5세기 초의 인물로 곤지가 왜국으로 가는 461년이 되면 그 딸은 최소 노년이 되어야 하므로 동일 인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김상 2011). 또 이렇게 소략한 출신 기록에 왕비가 소생이 없다는 것도 매우 예외적인 경우로 그녀가 백제왕실 출신이기 때문에 그 출자(出自)에 대한 기록이 윤색되었을 가능성도 크다. 귤은 남방 작물이기 때문에 ‘귤희’(橘姬)라는 이름은 그녀가 왕족이지만 남방의 소국에서 자라났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한다. 필자에게는 ‘귤이 회수(淮水)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橘化爲枳, <안자춘추>)는 고사가 새삼 다가와 그 소국 또는 지방이 어디일지 ‘월주백제’와 관련하여 상상력을 발휘하게끔 하기도 한다.
또한 원비와 차비는 초향번사희 이전의 원래 부인들인 듯한데, 원비 한원은 ‘갈성원대신(葛城圓大臣)’의 딸이라고 기록되어 있고 갈성씨는 본래 백제 출신의 왜국 유력 가문이며(김상 2011), 이름조차 ‘한(韓)의 여인’이어서 백제 출신일 가능성이 크다. 한원은 귤희에 앞서 곤지의 세 아들을 낳은 것이 되나, 곤지의 왜국행 시점에서 생사는 알 수 없다. 또 차비 치족희 역시 출신 기록이 없어 백제 출신으로 생각되며 사마에 앞서 아들 둘을 낳지만 백제나 왜 왕위와는 인연이 없다. 즉 귤희나 한원 만큼의 유력 가문 출신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차차비 동녀군은 <일본서기>에 출신과 웅략왕과의 만남이 자세하게 적혀 있어 왜국 출신임이 확실해 보인다.
<일본서기>의 기록에 따르면 곤지의 왜국행 도중 태어난 사마는 백제로 돌려보내진 것으로 되어있는데, 그 어머니가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다만 ‘곤지=웅략왕’이라면 그녀는 왜왕의 권위에 화룡점정을 찍을 수 있는 백제 왕실 출신의 왕비가 된 반면, 사마는 태어나자마자 어머니와 생이별하고 백제 본국의 어딘가로 가 (귤희의 친정은 백제 남방의 어느 소국에 있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한다) 자라나게 되는 것이다. 왜왕에게 백제 출신의 왕비가 어찌하여 그토록 큰 의미를 가지는가는 후에 김상(2004, 2011)의 ‘진왕제 가설’을 검토하면서 자세히 논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도미부인, 개로왕, 도림, 곤지, 귤희 ... 그리고 ‘찌라시’ 또는 ‘삐라’
‘도미부인’ 이야기는 <삼국사기> 열전의 ‘도미전’에 실려 있는데 이야기의 골자는 한미한 집안 출신의 (編戶小民) ‘도미’의 이력보다는 그의 부인이 왕의 수청 강요를 기지를 발휘하여 벗어나고 왕의 형벌을 받은 그와의 사랑을 지켜내는 과정이다. 또 왕이 분노하여 도미의 두 눈을 멀게 하고 쫓아내며, 여인의 정절에 대한 내기를 걸고 도미부인에게 두 번이나 수청을 강요하는 장면에서 왕의 폭군적 면모도 강조되어 있다. 물론 앞의 인물 소개에서 밝혔듯이 도미부인 이야기의 시기가 <삼국사기> 기록에 보이는 백제 4대 ‘개루왕’ 때가 아니라 21대 ‘개로왕’ 때라는 것이 통설인데(김운회 2010, 이도학 2010), 이야기대로만 보면 개로왕은 용서 못할 폭군이었다는 결론이 된다.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도미부인 이야기를 유교적 관점에서 여인의 정절에 대한 교훈적인 고사라고 여겨 역사적 인물을 다루는 ‘열전’에까지 기록했다고는 하나, 이야기의 실제 초점은 개로왕의 ‘어리석음’이며 이 점에서 한성 함락을 앞두고 간첩 도림에게 농락당한 ‘본기’ 개로왕 조 기사의 초점과 상통한다고 한다(이도학 2010). 또 도미부인이나 바둑으로 왕의 신임을 얻고 함정을 파 농락하는 간첩 도림(道琳) 이야기의 실재성은 의심할 수밖에 없는데 동일한 서사구조와 교훈을 가지는 이야기가 동서고금에 산재하기 때문이라고 하며(이도학 2010) 필자도 이를 탁견이라고 본다. 간첩 도림 이야기의 경우 내용과 서사구조가 동일한 이야기들과 심지어는 동명의 인물까지 중국 사료나 고전에 종종 나타나고 있다고 하고, 도미부인 이야기는 비슷한 내용이 14세기 이탈리아의 사회상을 나타낸 <데카메론>에서도 나타나는 등 보편적인 이야기라고 한다(이도학 2010). 권력자가 부하나 백성의 아내를 탐하는 내용은 <구약 성경>에서 다윗왕이 장군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솔로몬왕의 생모)를 탐하여 취하고 우리야를 계략으로 죽게 만드는 이야기에서도 볼 수 있으며, <춘향전>도 결국 동일한 서사를 가지고 있다.
도미부인과 도림 이야기에서 개로왕의 어리석음과 폭력성이 강조되었다면 이 이야기들의 목적은 개로왕을 음해하는 것, 즉 ‘마타도어’일 가능성이 크다(김운회 2010). 한마디로 이야기의 사실 여부와 관계없이 민심을 흉흉하게 만들거나 이미 흉흉한 민심을 악화시키려는 목적으로 당대에 한성 주변 백제 백성들에게 퍼뜨려진 ‘찌라시’일 수 있다. ‘도림’이 건의했다는 개로왕의 왕권강화책은 궁궐을 중수하고 비유왕의 능을 수축하며 ‘사성’(蛇城, 삼성동 토성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동쪽에서 ‘숭산’(崇山, 보통 하남 검단산으로 비정된다)까지 제방을 쌓는 것이다. 이들 정책이 선의(특히 제방 구축의 경우 홍수 예방과 군사적 방어 두 가지의 효과가 있다)였는지는 별론으로 하고, 오랜 공사기간을 필요로 하는 데다 노동력 징발 등에 있어 무리수를 두어 민심이 이반하고 있었을 가능성은 충분해 보인다. 또 도미부인 이야기는 개로왕의 도덕성에 타격을 주고 백성들의 지지를 떨어뜨리려는 목적이 농후해 보인다.
그런데 개로왕 당대에 ‘찌라시’ 유포자들이 참고했을 도미부인 이야기의 모티브와 관련하여 필자는 <일본서기>에서 곤지의 왜국행 기사가 계속 눈에 걸린다. 즉 도미부인 이야기가 개로왕, 곤지, 귤희의 실제 관계에서 모티브를 따오지 않았을까 하는 추측이 가능하다. 개로왕은 귤희라는 왕족 여인(먼 친척일 것이다. 고대 왕조의 왕실에서 이 정도의 근친혼은 매우 흔하다)을 왕후 또는 후궁으로 들이려고 강요까지 하였으나 실은 곤지와 귤희가 이미 연인 관계였으며 아이까지 가진 상태였다는 스토리가 가능하다. ‘개루왕’은 실제로 ‘개로왕’, ‘도미’는 곤지, ‘도미부인’은 귤희였던 셈인데, 김운회(2010)의 추리대로 ‘형사취수제’가 당시 윤리 관념에 있어 흠이 되지 않는다면, 이 왕실 풍문을 그대로 퍼트리는 것은 ‘마타도어’의 효과가 없으므로 악의적으로 왜곡시킴으로써 ‘도미부인’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 있다.
도미부인 이야기는 흉흉한 소문으로서의 ‘찌라시’ 성격뿐만 아니라 적국으로의 귀순을 권장하는 ‘삐라’의 성격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도미가 ‘편호소민’(編戶小民)이라고 하여 소문을 들을 백성들이 이야기에 대해 공감을 가지기 쉽다. 또 왕의 비도덕성과 폭력성에 대한 이야기는 백성들이 동원되었을 대공사들 및 힘든 생활과 오버랩되어 환멸을 느끼게 만들 수 있다. 무엇보다 도미부인과 도미가 도망친 행선지가 하필 개로왕의 평생 원수 고구려이다. ‘개로왕의 폭정에 신음하는 자 고구려로 귀순하라’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다.
김운회(2010)는 개로왕의 음해세력인 ‘찌라시’의 유포자로 개로왕에 반감을 가진 귀족세력을 지목하고 있으나, 필자는 ‘도림’으로 대표되는 백제 내 고구려의 ‘간첩’ 세력들이 이 ‘찌라시’이자 ‘삐라’의 유포자이고, 그 배후에는 <삼국사기> 개로왕 21년 (475) 조의 간첩 도림 기사 바로 다음에 나타나는, 백제에서 고구려로 도망쳐 장수왕의 고구려군 선봉장이 되었다고 하는 재증걸루(再曾桀婁)와 고이만년(古尒萬年)이 있었다고 추정하고자 한다.
하남 '위례사랑길'의 '도미나루'. (사진 아래, 2013. 4)
고구려 간첩 '도림'이 실재했던 인물이라면, 도미 부부가 건너갔다는
이 나루터는 사실 '도림' 자신의 도주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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