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문주왕과 해구 <2> - 백제 내전기(475~479)의 인물들

이름없는 꿈 2014. 5. 6. 12:49

문주왕(문주왕, ? ~ 477, 재위 475~477):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22대 왕.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출신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상좌평을 지냈으며, 개로왕의 명을 받고 신라에서 1만의 원병을 이끌고 오지만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처형당하자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즉위한다.

 

해구(解仇, ? ~ 478): 5세기 백제 내전기의 권신(權臣). 그가 부여의 왕성(王姓)이며,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도 생각되는 유서 깊은 성씨인 해(解)씨인 것으로 볼 때 웅진보다는 한성 계열의 귀족으로 판단할 수 있다. 476년 8월 병관좌평에 올랐고 477년 9월 문주왕을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직전인 477년 7월 곤지의 죽음 이후 정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아 곤지 역시 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주왕의 어린 태자인 13세의 삼근왕을 옹립하고 국정을 농단하다 역시 한성계 귀족인 진(眞)씨 세력과 대립하여 웅진 북쪽의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사망한다. 5세기 초 전지왕 대의 병관좌평 해구(解丘)와는 다른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백제의 해씨 세력과 해구
해씨는 <삼국유사>의 유화(柳花: 버드나무 꽃)와 고주몽 탄생 설화에 등장하는 고주몽의 아버지 태양신 해모수(解慕漱)라는 이름에서 볼 수 있듯이, 고구려, 나아가 단군조선 계통으로 생각되는 북부여(동부여의 시조 금와(金蛙) 탄생 설화에서는 해모수가 금와의 할아버지로 등장한다)의 기원 성씨로 그 유래가 매우 깊다. 해(解)는 다름 아닌 태양을 뜻하는 우리말 ‘해’의 음차라는 것이 통설이며 ‘해모수’는 ‘해 모습’(최래옥 2000) 또는 ‘해 머슴애’(김상기 1984; 윤내현 1994)를 음차한 표현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따라서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왕성(王姓)도 해씨였을 가능성을 주장하는 설이 많다. 고구려의 시조 추모왕(광개토태왕비에 기록된 고주몽의 원래 이름)이 ‘해추모’였던 셈이다. 고구려의 경우 시조의 아버지를 해모수라 하고 있고 백제의 경우에도 부여의 계승자를 자처하고 있으며 ‘동명묘’ 역시 고구려 시조보다는 부여의 시조를 섬기기 위한 것이라는 점 때문이다. 두 나라의 시조인 ‘고주몽’이나 ‘부여온조’의 경우 고씨나 부여씨로 나중에 추존(追尊)된 것일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2세기 태조왕, (한성)백제의 경우 3세기 고이왕 이후 왕성의 교체가 이루어졌다고도 추측된다. 다만 ‘비류백제 삼한설’을 따를 경우 한성백제의 고이왕계는 진(眞)씨이며, 비류백제 진왕(辰王)실 출신인 부여씨의 한성백제 왕권 계승은 5세기 초 이후이다(김상 2004, 2011).


하지만 해씨는 왕통의 교체 이후라고 하더라도 왕후를 배출하는 등 큰 세력을 유지했다고 생각되며, 백제에서 해씨가 8성 대족(解, 眞, 木, 沙, 燕, 國, 協, 苩)에 들어가는 것에서도 이를 알 수 있다. 위에서 언급했듯이 김상(2004, 2011)은 금강 유역에 중심을 둔 삼한백제(비류백제)의 왕성이 곧 부여씨라고 보고 있는데, 건국 설화에서 시조 비류와 한성백제 시조 온조가 형제라는 표현에서 보듯 부여씨와 해씨는 결국은 같은 계통으로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 한성 함락(475)이라는 대사건은 왕권을 담당해온 부여씨의 헤게모니가 크게 흔들리는 결과를 가져왔을 것이다. 소략한 <삼국사기> 문주왕 조 치고는 자주 등장하는 인물인 해구는 웅진으로 피난하면서 잔존 세력과 백성들을 이끄는 역할을 담당하지 않았을까 하며, 그는 이 과정에서 오래 전 내어줘야 했던 왕권을 ‘다시’ 해씨 세력에게 가져올 수 있으리라는 자신감을 얻었을지도 모른다. 즉 해구는 웅진 천도 직후 대두성을 중심으로 한성 피난 세력의 주거지와 방어선을 구축하는 것을 주도했을 수 있으며, 과연 그 이후 국방을 담당하는 병관좌평 직위에 오르게 된다. 

 

二年 春二月 修葺大豆山城 移漢北民戶 ... 秋八月 拜解仇爲兵官佐平
2년 봄 2월, 대두산성(大豆山城)을 수리하고 한수 북쪽의 민가를 옮겼다 ... 가을 8월, 해구(解仇)를 병관좌평으로 삼았다.
                                                                                                                                              - <삼국사기>, 문주왕 2년(476) 조

 

 

내전의 시작: 곤지의 귀국과 해구의 계책
<삼국사기> 문주왕 2년 조의 대두산성의 수리와 해구의 병관좌평 취임 기사 사이에는 외교 활동에 대한 기록이 있는데 이로부터 당시 백제의 바닷길 상황을 알 수 있다. 

 

三月 遣使朝宋 高句麗塞路 不達而還 夏四月 耽羅國獻方物 王喜 拜使者爲恩率
3월, 송(宋)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려 하였으나 고구려가 길을 막아 이르지 못하고 되돌아왔다. 여름 4월, 탐라국(耽羅國)에서 토산물을 바치니 임금이 기뻐하여 사신을 은솔(恩率)로 삼았다.
                                                                                                                                               - <삼국사기>, 문주왕 2년(476) 조

 

한성 함락으로 명백해진 백제 군사력의 열세는 바다에서도 나타나서 북조(북위)도 아니고 남조 송에 사신을 파견하는 것조차 고구려 수군의 방해로 여의치 않을 지경이다. 요동, 요서와 산동을 거치는 백제의 전통적인 서해 연안 항로가 막혔다는 뜻인데, 이런 열세는 48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지만 이후 얼마 안 되어 크게 바뀌게 된다. 이는 백제 해상 네트워크의 회복과 함께 백제 서부와 양자강 하구를 연결하는 직통항로 개척과 연관이 있을 듯 하며, 필자의 사극 기획 중반부의 중요한 모멘텀으로서 ‘월주백제’에 대한 별도의 포스팅에서 다룰 기회가 있을 것이다. 또 476년 대(對) 송 백제 사신의 실패와 477~478년 왜왕 무(武) 사신의 성공은 묘하게 대비되어 짝을 이루고 있는데 그 국서 내용과 함께 의미심장한 기록이라고 할 수 있다. 


백제의 서해 수운(水運)이 이렇게 어려움을 겪는 반면 남해 수운에는 별 문제가 없었던 듯 하며 탐라국(제주)의 사신 방문 기사가 이를 잘 말해준다. 탐라 사신에게 내려진 은솔은 좌평, 달솔에 이은 세 번째 높은 관등으로, 임금이 ‘기뻐하며’ 이를 내렸다는 것은 한성 함락으로 인한 삼한 소국들의 동요가 그만큼 심했다는 것과 먼 소국이 봉물을 바쳐 보답으로 큰 벼슬을 내렸다는 것을 강조하여 이를 진정시키려는 제스처일 가능성이 커 보인다. 한편 남해 항로가 ‘파란불’이라는 것은 영산강 유역의 소국 세력들이 건재했다는 것과 다음해(477) 4월 이전으로 추정되는 곤지의 귀국에 최소한 외부적인 걸림돌은 없었다는 뜻도 될 수 있다.


필자의 ‘소설’이라는 점을 분명히 하고 곤지의 귀국을 살펴보면, 477년 4월의 내신좌평 임명은 그의 (타의에 의한 것일 가능성이 큰) 웅진 입성을 이야기하는 것이고 그 전 시점에 이미 왜국을 말다(末多, 후의 동성왕) 또는 백발(白髮, 후의 왜국 청령왕)에게 맡긴 후 백제 연맹의 어느 영토 내에는 (자의로) 들어와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그는 얼마 동안 영산강 유역이나 인근 이북의 소국에 머무르며 지지 세력과 군사를 모으려 노력했을 것이다. 이는 개로왕이 구상했거나 아니면 곤지의 독자 구상일 수도 있는 ‘플랜 B'의 실행이기도 하다(왜국을 장악한 이후이므로 반 이상 완성 단계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다만 앞 포스팅에서도 보았지만 ’플랜 B'는 웅진으로부터의 거리나 ‘시간 싸움’에 있어 문주왕과 해구의 ‘플랜 A'에 비해 불리할 수밖에 없다. 왕위 계승 1순위인 곤지를 '좌현왕'에서 끌어내리고 웅진으로 갑작스레 홀로 불러내 묶어두는 '내신좌평' 임명은 해구의 머리에서 나오고 곤지를 경계하는 문주왕이 동의한 '한 수'였을 가능성도 배제하기 어렵다. 곤지는 왕명을 마지못해 따랐을 것인데, 이를 거절한다는 것은 곧 내전일 뿐만 아니라 반역을 토벌한다는 명분까지 문주왕과 해구에게 넘겨주는 처사일 수 있다. 또 곤지가 시도했을 백제 남부의 소국 규합이 이해관계나 명분 갈등으로 장기화되거나 완비되지 않은 상태였다면 곤지가 '이참에' 대놓고 내전을 일으키기도 쉽지 않은 상황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결국 본거지와 거리를 둔 채 웅진에 머무르게 된 곤지의 '준비되지 않은' 소수 세력과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잠깐의 우세한 기회를 잡은 문주왕-해구 세력이 충돌하자 '검은 용'이 날게 된다(<삼국사기>, 477년 5월). 한성계 귀족들, 신진 토착 귀족 세력들, 금강 유역의 소국들 등은 두 편 중의 하나를 택해야 하는 상황이 되었는데, 이 다음 열전과 답사 포스팅들에서 내전의 전개와 함께 이들의 행적들을 다루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