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주왕(文周王, ? ~ 477, 재위 475~477): <삼국사기> 기록상 백제의 22대 왕.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실제 출신은 미심쩍은 부분이 많다. 상좌평을 지냈으며, 개로왕의 명을 받고 신라에서 1만의 원병을 이끌고 오지만 한성이 함락당하고 개로왕이 처형당하자 웅진으로 수도를 옮기고 즉위한다.
해구(解仇, ? ~ 478): 5세기 백제 내전기의 권신(權臣). 그가 부여의 왕성(王姓)이며, 고구려와 백제의 초기 왕성으로도 생각되는 유서 깊은 성씨인 해(解)씨인 것으로 볼 때 웅진보다는 한성 계열의 귀족으로 판단할 수 있다. 476년 8월 병관좌평에 올랐고 477년 9월 문주왕을 살해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으며, 그 직전인 477년 7월 곤지의 죽음 이후 정권을 장악하는 것으로 보아 곤지 역시 살해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문주왕의 어린 태자인 13세의 삼근왕을 옹립하고 국정을 농단하다 역시 한성계 귀족인 진(眞)씨 세력과 대립하여 웅진 북쪽의 대두성에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패하고 사망한다. 5세기 초 전지왕 대의 병관좌평 해구(解丘)와는 다른 사람인 것이 확실하다.
100년 전쟁의 패배와 재건: 웅진 천도와 문주왕의 등장
4세기 후반부터 격렬하게 전개된 백제와 고구려의 ‘100년 전쟁’은 처음에는 근초고왕의 평양성 공격과 고구려 고국원왕의 전사(371)에서 보듯이 백제가 우위를 점하였으나, 광개토태왕의 즉위(391) 이후에는 백제의 수세(守勢)가 계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왕자 실성을 볼모로 광개토태왕에게 5만 군사를 요청(400)하며 신속(臣屬)했던 신라는 5세기 초중반이 되면 자립을 도모하며 백제와 혼인동맹(나제동맹, 433)을 맺게 되지만, 그럼에도 백제는 고구려에 대한 열세를 만회하기에는 역부족이었던 듯하다. 이는 개로왕의 대 북위 국서(472)에서 ‘30년 동안의 침탈’을 호소하는 대목에서도 알 수 있다.
475년 한성 함락 직후 백제는 웅진에 수도를 정하고 신라에서 1만의 원병을 얻어온 문주왕이 왕위에 오른다. 문주왕의 즉위와 관련하여 <일본서기>에서는 한성 함락 때 왕후와 왕족이 모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서기>의 신빙성이 부족하다고는 하지만 이 기록이 옛 기록이라고 하는 <백제기>를 인용하고 있어서 사실 관계를 마냥 무시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즉 태자는 물론 왕자들도 거의 없는 상황에서 왕위 계승 서열 1위는 왜국에 가 있는 곤지이다. 하지만 곤지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이유는 단순한 것인 듯하다. 즉 문주는 가까이 있고 곤지는 멀리 있었던 것인데, 곤지는 한성 함락 당시에 아직 귀국하지 않았던 것 같다. ‘곤지=웅략왕’이라면 이는 매우 당연한 것이기도 하다. 한성 함락 소식이 지금의 오사카 부근 지역까지 전해지는 데에도 시간이 꽤 걸릴 뿐만 아니라, 이 지역에서 한강 유역까지 상당수의 구원군을 신속하게 보낸다는 것도 굉장히 어렵기 때문에 곤지는 당장 할 수 있는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또 초토화된 한성백제 대신 백제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담당할 수 있는 지역은 금강 유역과 영산강 유역의 소국들인데, 곤지의 왜(倭)계 세력이 열도와 연계를 가지고 구원군을 모집할 수 있는 영산강 유역보다는 마한 시절부터 삼한의 맹주 노릇을 하던 금강 유역이 피난하여 내려가는 한성의 잔존 세력에게 더 가까웠을 것이다.
문주왕의 출신은 <삼국사기> 기록상 개로왕의 그냥 ‘아들’이어서 실제 왕자였다고 하더라도 최소한 왕위 계승의 우선권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상좌평(上佐平)을 역임하였으므로 개로왕 대에서부터 국정에 상당히 참여하고 있었을 것이며, 무엇보다 신라 왕실이라는 든든한 처가를 두고 있었던 듯하다. 원병 ‘1만’은 6세기 중반까지 한반도 중남부 지역의 전쟁에서는 나타나지 않는 대규모로 신라로서는 전 병력을 동원했다고 해도 좋을 정도인데, 이는 아무리 동맹국이라 하더라도 쉽게 허락할 수 있는 규모가 아니다. 하지만 필자 개인적으로는 이를 근거로 문주왕이 ‘신라 왕족’이라고 추측하는 것은 지나치다고 생각하는데 이 경우 백제가 별안간 신라의 ‘보호령’이 되어버리는 셈이기 때문이다.
한편 문주왕의 인물됨에 대하여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 性柔不斷 而亦愛民 百姓愛之
... 그의 성품은 우유부단하였으나 백성을 사랑하였으므로 백성도 그를 사랑하였다.
- <삼국사기> 문주왕 즉위년(475) 조
‘우유부단’, 즉 ‘사람 좋은’ 성격인데 사람만 좋아서는 구원군을 이끌고 온다던지 나라를 재건한다는 것은 어려울 수밖에 없으므로 문주왕은 능력 또한 어느 정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백성을 사랑하였다’고 하고 많은 지지도 얻었다고 하니 ‘난세’가 아니라면 ‘성군’(聖君)이라는 평가도 받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결국 ‘우유부단’하다는 부정적인 평가가 우선하게 된 것은 한성계 귀족 세력 간의 암투를 조정하지 못한 데에서 비롯된 듯한데, 본 열전 카테고리의 다음 포스팅에서 병관좌평 해구(解仇)와 진(眞)씨 귀족들의 권력 투쟁과 내전에 이르는 과정을 살펴보게 될 것이다.
신라의 구원군 1만의 모습과 행방
<삼국사기>는 문주왕이 신라군 1만을 데리고 왔다는 기록 이외에 신라군이 웅진성에까지 왔는지, 왔으면 어떤 역할을 하였는지, 또 언제 돌아갔는지 등에 대해 어떠한 기록도 남겨놓고 있지 않다. 상상력을 발휘했을 때 개연성이 있는 신라군의 역할은 웅진 천도 직후 백제 왕실과 한성 함락으로 동요하며 이탈까지 생각할 수 있는 연맹 소국들을 중재하는 ‘균형자’ 역할일 수 있는데 현대사에서 해방 이후 ‘미군 주둔’을 생각하게 된다. 병관좌평 해구가 발호하여 문주왕이 실권을 빼앗기며, 귀국한 곤지가 죽고 내전에 돌입하게 되는 것은 신라군이 이미 철수한 이후일 수 있다.
한편 문주왕이 이끌고 온 신라군의 모습은 문화적 충격을 줄 정도로 뜻밖에 이국적(異國的)인 모습이었을 수 있다. 김상(2004, 2011)은 <삼국사기> 기록과 경주 부근에서 다량 발견되는 매우 특이한 서역식의 고고학적 유물들을 통해 신라의 왕실 혈통과 군사, 문화에 대해 이제까지 필자가 접한 것 중 가장 급진적인 해석을 내놓고 있는데 상당히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된다. 즉 신라는 반도의 동남쪽 끝이라는 궁벽한 위치에도 불구하고 백제 본국이나 고구려보다도 이질적인 민족과 문화가 유입된 ‘다문화’ 국가라는 것인데, 그 중심에는 세 차례에 걸친 북방 유목민족의 유입이 있었으며 이 때문에 ‘로마 문화 왕국’(요시미즈 츠네오 2002)이라는 평가까지 받게 되었다는 것이다. 신라의 민족 유입에 대해서는 나중에 본 열전 카테고리의 ‘신라’ 편에서 자세히 다루게 될 것이다.
일면 지나치다고도 생각되지만, 가령 343년의 신라와 346년의 신라군은 다음과 같이 묘사될 수 있다고 한다.
(343년)
중앙아시아에서 온 수천, 수만 마리의 군마가 도열해 있고, 무수한 가축과 유목민들의 텐트가 수도를 뒤덮고 있었을 것이다.
(346년)
금성을 포위한 가야인들(왜병) 앞에 페르시아와 로마식 병기로 무장한 이상한 군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서양식 금속 제련기술을 가지고 있어서 동양식 제련기술로 철제기구를 만든 중국, 고구려, 백제, 일본 등과는 다른 서양식으로 철제기구를 만들었다.
- <삼한사의 재조명>, 김상(2004)
475년 웅진성 또는 그 주변에 주둔한 신라군의 모습은 이로부터 130여년이 지난 후로 상당히 한화(韓化, 한반도화)되었을 수는 있지만 그 독특함이 여전하지는 않았을까. 신라와 로마-중앙아시아 유물의 유사성을 직접적이고 혈통적인 유입이 아니라 ‘문화 교류’로만 설명하는 것은 백제와 왜 유물의 유사성에 대한 통상적인 해석이 ‘문화 교류’뿐인 것과 마찬가지로 너무 궁색하지 않은지 생각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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