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가(伯加: ? ~ 501)
5세기 후반 백제의 위사좌평, 가림성주
백가는 동성왕대의 백제에서 매우 중요한 활약을 했을 것으로 생각됨에도, 그에 대한 기록은 오직 <삼국사기>에서 볼 수 있는 몇몇 기록뿐이다. 백가는 중요 인물의 상세한 일생을 다룬 <삼국사기> 열전에도 나와 있지 않고 다만 그의 ‘반역’ 상황에 대한 기록은 매우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삼국사기: 동성왕조>
1. 八年 春二月 拜苩加爲衛士佐平
8년(서기 486) 봄 2월, 백가(苩加)를 위사좌평으로 삼았다.
2. 二十三年 ... 八月 築加林城 以衛士佐平苩加鎭之
23년(서기 501) ... 8월, 가림성(加林城)을 쌓고 위사좌평 백가에게 그곳을 지키게 하였다.
... 十一月 獵於熊川北原 又田於泗沘西原 阻大雪 宿於馬浦村 初 王以苩加鎭加林城 加不欲往 辭以疾 王不許 是以 怨王 至是 使人刺王 至十二月乃薨 諡曰東城王
... 11월, 임금이 웅천의 북쪽 벌판에서 사냥을 하였고, 또 사비의 서쪽 벌판에서 사냥하였는데 큰 눈에 길이 막혀 마포촌(馬浦村)에서 묵었다. 처음에 임금이 백가에게 가림성을 지키게 하였을 때 백가는 가기를 원하지 않아 병을 이유로 사직하고자 했으나 임금은 이를 승낙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백가는 임금에게 원한을 품고 있었다. 이때에 와서 백가가 사람을 시켜 임금을 칼로 찔렀고, 12월에 이르러 임금이 돌아가셨다. 시호를 동성왕이라 하였다.
백가는 486년에 위사좌평이 되었다가 501년에 가림성주로 옮겼으니 요즘 같으면 ‘경호실장’에 ‘수도방위사령관’을 겸했음직한 직책을 무려 15년 동안 유지한 셈이다. 이것은 임금의 상당한 신임을 얻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직책으로 보아 백가는 무장(武將)이었으며, 고구려에 의한 한성 함락(475년)과 웅진 천도 이후 전면에 등장하여 동성왕과 동고동락할 정도의 사이였던 듯하다. 그렇게 보면 백가의 연배는 동성왕(동성왕 모대(牟大)의 즉위 시 나이에 대해서는 16세부터 30대 후반까지 설이 다양하다)과 비슷하거나 조금 많은 정도로, 젊은 나이에 위사좌평에 올랐을 가능성이 있다.
<삼국사기: 무령왕조>
1. ... 卽位 春正月 佐平苩加 據加林城叛 王帥兵馬 至牛頭城 命扞率解明討之 苩加出降 王斬之 投於白江
... 그가 왕위에 올랐다. 봄 정월, 좌평 백가가 가림성(加林城)을 거점으로 반란을 일으키니 임금이 병사를 거느리고 우두성(牛頭城)에 이르러 한솔 해명(解明)을 시켜 토벌하게 하였다. 백가가 나와서 항복하자 임금이 백가의 목을 베어 백강(白江, 금강)에 던졌다.
항복하였는데 목을 베어버리다니 이상하다. 게다가 삼국사기의 저자 김부식은 상세한 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손수 ‘극악한 악인’(元惡大憝)이라는 표현을 써가며 준엄한 논평까지 덧붙였다.
2. 論曰 春秋曰 人臣無將 將而必誅 若苩加之元惡大憝 則天地所不容 不卽罪之 至是自知難免 謀叛而後誅之 晩也
사관이 논평한다.『춘추(春秋)』에는 ‘신하된 자는 군주를 넘보려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이러한 마음을 가진 자는 반드시 죽여야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백가와 같은 극악한 악인은 천하에 용서받지 못할 자인데 즉시 처단하지 않고 이때에 와서 자기가 스스로 죄를 벗어나지 못할 것을 알고 반역을 일으킨 후에야 처단하였으니, 때는 늦은 것이다.
임금을 죽인데다가(‘사람을 시켜’ 죽였다는데 이것도 생각해 볼 부분이 적지 않다) 반란을 일으켰으니 묘청의 난을 직접 겪고 진압한 김부식으로서는, 이런 비분강개는 그가 참조한 사료들에서 백가의 기록을 발견했을 때 당연할 수도 있는 반응일 것이다. 하지만 이대로 백가에 대한 평가를 종결짓기에는 정황과 증거가 너무나 부족하다. 게다가 백가가 15년 동안 충성을 바친 동성왕의 성향과 정치 행적들을 살펴본다면 백가가 (사실로서 뿐만 아니라 기록에 의해서도) 모함을 당했을 뿐만 아니라 ‘역사’의 희생양이 되었을 가능성을 배제하기는 어렵다. 새로 즉위한 무령왕은 과연 백가를 기꺼이 죽였을까?
백씨의 연원 - 공주 지역 토착 세력설과 마한의 역사
백가의 백(苩)씨는 대체로 공주 지역의 토착 세력으로 추측되고 있다(김종원 2005; 문안식 2008). 김갑동(2010)은 나아가 백씨라는 성이 금강 중상류를 일컫는 백강(白江)에서 유래하였으며, 백제의 웅진 천도 이전 공주 수촌리 유적의 주인공일 가능성을 제기하고 있다.
수촌리 유적은 웅진성에서 북쪽으로 약 8㎞ 지점에 위치하고 있다. 여기에서는 금동제 유물을 비롯하여 환두대도, 중국제 도자기, 장신구, 마구류 등이 출토되었다. 이는 당시 지방에서 보기 드물게 사치스럽고 화려한 것들이다. 이는 아마 백제 왕실에서 지방 세력에게 준 위세품으로 추정된다. 이 유물의 연대로 볼 때 수촌리 유적은 웅진천도 이전의 것으로 추정된다. 이 유적의 조영 세력은 백씨(白氏) 세력이 아닌가 한다. ‘백(白)’이라는 성씨는 ‘백강(白江)’의 ‘백(白)’에서 유래한 것으로 추측되기 때문이다. 한성이 함락되고 황폐화되자 문주왕은 급히 천도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 백씨 세력이 웅진의 지리적 이점을 들어 웅진 천도를 권유했을 가능성이 있다.
수촌리 고분군의 한 고분. 공주의 평야를 바라보고 있다. (2013. 6)
이도학(2010)은 백가 이외에 사료에서 보이는 백씨가 극히 드묾을 들어 백씨가 공주 토착 세력일 가능성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으나, 백제사에서 출현하는 여러 성씨에 대한 한 연구는 백씨가 등장하는 기록이 더 있고 이들이 연씨와 함께 공주 토착세력이며, 나아가 마한 소국의 왕족일 수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이는 공주를 비롯하여 현재의, 천안, 아산 등 충남 중북부 지역은 경기 남부 지역과 함께 한성백제에의 복속 이전 마한의 맹주 노릇을 하는 중심 소국들로 추정되고 있기 때문이다. 문주왕~무령왕 대의 역사 기록에서 발견되는 웅진성(공주)을 비롯하여 가림성(부여), 대두성(아산) 등은 모두 마한 소국들의 옛 중심지일 가능성이 크고, 학계는 대체로 이들이 3-4세기를 거치며 한성백제에 복속되거나 적어도 하위 연맹국이 된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김성호(1984)의 비류백제설(아산 미추홀 설)과 김 상(2004;2011)의 삼한 진왕제 가설은 이와 관련하여 주목할 수 있는 견해들이다. 비류백제설은 백제 시조 온조와 비류 중 비류가 도읍한 미추홀이 인천이 아니라 아산만 일대라는 것이며, 아산만 일대에 산재하는 산성과 청동기 유적이 이를 뒷받침한다(인천에서는 미추홀과 관련하여 특별한 유적이 발견되지 않는다: 김성호(1984), 이덕일(2011)). 삼한 진왕제 가설은 백제는 처음부터 끝까지 연맹왕국의 특성을 가지고 있었으며, 마한의 맹주인 진왕(진왕)이 4세기 말 광개토태왕 전쟁 이후에야 아신왕 대를 경계로 온조계열 해씨에서 비류계열 부여씨로 왕통이 바뀐 한성백제에게 돌아가게 되었다는 것이다(김상). 김성호(1984)와 김상(2004; 2011)은 공히 이 비류백제(1~4세기의 마한 맹주)의 주류가 광개토태왕과의 대결에서 패해 왜 열도로 건너가 가야계를 비롯한 기존 토착 세력을 정복하고 고대 일본(왜국)을 구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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