웅략계 왕실의 왜왕위 탈환 계획과 평군진조(平群眞鳥)
498년 8월 무진주까지 내려와 무력시위를 벌인 동성왕이 후왕(侯王)들과의 타협안을 받아들인 데에는 어떤 의도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특히 백제왕에 대한 완전한 신속(臣屬)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는 후왕들이 왜국으로 떠나게 하는 ‘타협안 2’(‘폭군의 시대 <1>’ 포스팅 참조)를 동성왕이 선뜻 용인한 배경에는 이 후왕들의 왜국 장악이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계산이 깔려 있었을 수 있다. 461년 아버지 곤지(昆支; 부여곤)가 열도에 상륙하여 왜국의 도읍이 있는 ‘야마토’ 지역까지 진격하면서 ‘살기 위해’ 벌인 악전고투를 생생히 기억하고, 477년 곤지가 반도로 떠난 후 잠시 왜왕 노릇도 한 것으로 설정되는 ‘말다(末多; 모대)’ 동성왕은 내심 열도로 건너간 후왕들의 자중지란과 몰락을 예상하며 타협안을 반기게 된다. 게다가 그는 후사가 없는 자신의 후계 1순위로 항상 경계해왔던 사마(斯麻)도 스스로 왜국에 가겠다고 하니 껄끄러운 상대들이 이참에 손대지 않고 정리될 수 있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런데 막상 열도에 상륙한 사마와 후왕들의 행로는 일단 순풍에 돛단 듯 매끄럽게 이루어지게 된다. 후왕들 중 유(鮪)라는 인물과 긴밀한 유대를 가지고 있던 왜국의 토착 세력가 평군진조(平君眞鳥)가 도읍의 상황을 미리 정리해놓고 후왕들 일행의 앞길을 뒷받침하고 있었던 것이다.
十一年(戊寅四九八)八月。億計天皇崩。大臣平群眞鳥臣。專擅國政。欲王日本。陽爲太子營宮。了卽自居。觸事驕慢。都無臣節。
11년(498) 8월에 억계왕(億計天皇)이 죽었다. 대신 평군진조신(헤구리노마토리노오미)이 국정을 마음대로 하여 일본(야마토)의 왕이 되려 하였다. 거짓으로 태자의 궁을 짓는다 하고, 완성되자 자신이 살았다. (그는) 모든 일에 교만하여 도무지 신하로서의 예의가 없었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武烈)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김상(2011)은 영산강 유역 후왕들의 도왜(渡倭)에 맞춰 평군진조가 억계왕을 죽이고 국정을 장악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데 합리적인 의심이라고 생각된다. 이러니 응신계(應神係) 왕족들의 입장에서 볼 때에는 평군진조만큼 교만하고 무례한 만고의 역적도 없을 것이다.
사마와 후왕들이 왜국에 온 직후에는 별다른 군사력을 갖추지 못했던 것으로 보인다(김상 2011). 즉 평군진조가 아무리 무례한 역적으로 종국에는 타도해야 할 대상이라도 웅략계(雄略係)의 왕통 회복을 위해서는 일단 그의 세력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이 상황 또한 사마의 계산에 있었을 것이며, 영산강 유역과 임나(任那)에서 ‘지원군’이 당도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그는 숨겨졌던 웅략계 후손인 사아군(斯我君)을 만나 유(鮪), 대반금촌련(大伴金村連) 등의 후왕들과 함께 왜왕 옹립 작업을 준비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그러나 이 모든 계획은 무열(武烈)이라는 후왕이 움직이면서 틀어진다. 설정 상 백제 부여씨 진왕실의 방계 출신으로 장차 ‘삼한의 왕’을 꿈꾸는 그는 일찍이 기생반을 타도하고 임나의 세력 네트워크를 장악하며(487, 489), 왜국 응신계 왕통과 연계되어 아들이 없는 억계왕으로부터 왜왕 계승을 은밀히 약속받기까지 하면서(495) ‘권력’의 1차 목표를 향해 달려왔다. 경쟁자들이 미비한 세력으로 사정권 안에 들어왔고, 여기에 더하여 자신이 ‘사랑’이라 강변하는 오래된 콤플렉스의 대상으로 경쟁자의 부인이 되어 있는 영원(影媛)도 왜국에 와 있는 이 시점이 무열에게는 다시없는 기회였다. 필자가 본 5세기 후반~6세기 초반을 담은 <일본서기>의 기사 중에서는 가장 ‘문학적’이라고 생각되는 다음 이야기에 그 과정이 담겨 있다.
‘한식(韓式) 담장’과 ‘왜식 문양(倭文織) 매듭’: 애증(愛憎)이 얽힌 배신과 반란, 무열(武烈)의 등장과 영원(影媛), 그리고 유(鮪)
於是。太子思欲聘物部麤鹿火大連女影媛。遺媒人向影媛宅期會。影媛會奸眞鳥大臣男鮪。〈鮪。此云茲寐。〉恐違太子所期。報曰。妾望奉待海柘榴市巷。由是太子欲往期處。遣近侍舍人就平群大臣宅。奉太子命求索官馬。大臣戱言陽進曰。官馬爲誰飼養。隨命而已。久之不進。太子懷恨。忍不發顔。
그런데 태자(무열)는 물부추록화대련(모노노메노아라카히노오호무라지)의 딸 영원(影媛)을 부인으로 맞이하려고 중매인을 보내 영원의 집에 가서 만날 것을 약속하였다. 영원은 이전에 진조대신(眞鳥大臣)의 아들 유에게 강간당하였다. [유(鮪)는 시매(茲寐)라고 읽는다.] 태자의 기대에 어긋나는 것을 두려워하여, “첩은 해석류시(海柘榴市: 츠바키이치)의 거리에서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태자는 약속한 곳으로 가려고 생각하여 시중드는 사인(舍人: 토네리)을 평군대신의 집에 보내, 태자의 명으로 관마(官馬)를 구해오게 하였다. 대신은 “관마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기르는 것이 아닙니다. 명에 따르겠습니다.”라고 농담으로 거짓말하면서 오랫동안 대령하지 않았다. 태자는 내심 원망하였지만 겉으로는 내색하지 않았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武烈)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아래에 이어져 전개되는 <일본서기> 수록 이야기에서 쉽게 눈치 챌 수 있겠지만, ‘영원’이 이전에 ‘유’에게 ‘강간당했다(會奸: ‘會’는 피동형 문장을 만드는 역할이 있다)’는 표현은 사실과 매우 다를 가능성이 크다. 무열이 영원을 탐한 것은 명백해 보이나, 영원은 짐짓 회피하고 있다. 집이 아니라 거리에서 보자는 영원의 대답은 집까지 찾아온 개로왕에게 ‘목욕을 하고 오겠다’는 도미부인의 답을 연상시킨다. 단 두 글자(‘會奸’으로) 또는 한 글자(‘奸’으로)만을 고쳐 ‘유’가 악인으로 보이게끔 반대로 윤색한 기록이라는 게 필자의 추측이다.
즉 영원이 ‘유’의 부인이며, 오랜 세월이 흘렀음에도 집착을 버리지 못한 무열이 그를 빼앗으려 한다는 것이 필자의 설정이다. 게다가 영원은 부여씨로서 자립위왕(自立爲王)을 위한 백제 출신 왕비족의 조건에도 부합하는 것으로도 설정된다. 무열이 평군진조에게서 관마를 구하는 이야기는 서로 껄끄러운 상대임에도 모종의 일시적 협약이 이루어진 것으로 해석된다. 아래에 전개되는 사태에서 이렇게 설정한 이유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果之所期立歌場衆。〈歌場。此云宇多我岐。〉執影媛袖躑躅從容。俄而鮪臣來排太子與影媛間立。由是。太子放影媛袖移廻向。前立直當鮪。歌曰。之褒世能。儺鳴理鳴彌黎麽。阿蘇寐俱屢。思寐我簸多泥爾。都都摩陀氐理彌喩。〈一本。以之褒世。易彌儺斗。〉鮪答歌曰。飫濔能古能。耶陛耶哿羅哿枳。瑜屢世登耶濔古。太子歌曰。飫褒陀㨖鳴。多黎播枳多㨖氐。農哿儒登慕。須衛婆陀志氐謀。阿波夢登茹於謀賦。鮪臣答歌曰。飫褒枳瀰能。耶陛能矩瀰哿枳。瑜屢梅謄謀。儺嗚阿摩之耳彌。哿哿農俱彌柯枳。太子歌曰。於彌能姑能。耶賦能之魔柯枳。始陀騰余濔。那爲我輿釐據魔。耶黎夢之魔柯枳。〈一本。以耶賦能之魔柯枳。易耶陛哿羅哿枳。〉太子贈影媛歌曰。擧騰我瀰爾。枳謂屢箇皚比謎。施摩儺羅磨。婀我褒屢柁摩能。婀波寐之羅陀魔。鮪臣爲影媛答歌曰。於褒枳瀰能。瀰於寐能之都波柁。夢須寐陀黎。陀黎耶始比登謀。阿避於謀婆儺俱爾。太子甫知鮪曾得影媛。悉覺父子無敬之狀。赫然大怒。
이윽고 약속한 장소에 가서 태자는 가장(歌場)의 사람들 속에 서서[가장은 우타가키(宇多我岐)라고 읽는다.], 영원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멈추기도 하고 걷기도 하며 돌아다녔다. 잠시 후 유신(鮪臣: 시비노오미)이 와서 태자와 영원 사이를 밀치고 들어갔다. 이 때문에 태자는 영원의 소매를 놓고, 돌아서 앞으로 나아가 유(鮪)의 앞에 서서 노래를 불렀다.
(무열): 조수의 흐름이 빠른 여울(潮瀨)의 파도가 밀려오는 것을 보면, 헤엄치는 유의 곁에 나의 처가 서 있는 것이 보인다[어떤 책에서는 조뢰(潮瀨)를 수문(水門)으로 쓰고 있다].
유신(鮪臣)이 답하여 노래불렀다.
(유신): 신(臣: 평군진조)의 아들(鮪, 곧 자신)의 몇 겹으로 된 한식(韓式) 담장 안에 함부로 들어가게 해달라는 것인가. 태자여.
태자가 노래하였다.
(무열): 나는 큰 칼을 허리에 차고 있으나 지금은 이것을 빼지 않더라도 언젠가는 생각한 대로 하여 영원을 만나려 한다.
유신이 답하여 노래하였다.
(유신): 대군(大君; 오호키미, 무열을 가리키는 듯)이 여러 겹의 담을 만들려고 하지만, 그대는 만드는 방법을 모르니 좋은 담을 만들지 못할 것이다.
태자가 노래로 답하였다.
(무열): 신의 아들 유의 담쌓는 기술이 훌륭해도 땅이 흔들리고 지진이 나면 무너져 버릴 나무 담이다[어떤 책은 팔절(八節)의 시원(祡垣)을 팔중한원(八中韓垣)으로 쓰고 있다].
태자가 영원에게 노래를 하였다.
(무열): 금(琴; 코토) 소리에 끌려 금의 곁에 신(神)이 그림자가 되어 다가온다고 하는 영원은 옥(玉)에 비유한다면 내가 갖고 싶은 전복의 진주와 같다.
유신이 영원을 대신해서 답하여 노래하였다.
(유신, 영원의 뜻을 대신 전함): 대군(大君) 허리띠의 왜문직(倭文織)의 매듭이 늘어져 있지만, 저는 그 누군가 다른 사람을 생각하진 않아요.
태자는 비로소 유신이 이미 영원을 얻은 것을 알았다. 그 부자가 모두 무례함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고 몹시 노하였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武烈)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뮤지컬의 한 장면을 보는 듯 잘 짜인 구성의 위 이야기는 필자의 사극에서는 무열이 ‘유’와 마주쳐 대치하며 영원의 마음을 마지막으로 확인하고 모종의 결단을 내리는 장면으로 설정된다. 영원은 위 기록의 마지막 발화에서도 알 수 있듯이 무열과 함께할 마음이 없으며 유 또한 양보의 여지가 없는 것이다. 또 저잣거리와 ‘우타가키(歌場)’에서 셋이 마주치는 상황은 그들의 젊은 시절 반도에서 있었던 유사한 에피소드와 오버랩 되는 것으로 설정된다.
한편 ‘유(鮪)’의 정체는 “바다를 건너다니던 해양 세력”(김상 2011)이라는 추정이 있는데 탁견이라고 생각한다. ‘유’라는 글자부터 ‘다랑어’를 뜻하고, 무열이 읊는 ‘영원 곁에서 헤엄치는 유’의 모습에서도 짐작된다. 필자는 이런 추정을 바탕으로 ‘유’를 ‘백제-북위 전쟁’에 공을 세운 영산강 유역 후왕 중 한 사람(김상 2011)으로 설정하였다. 또한 ‘유’가 평군진조의 아들(男)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둘의 관계는 긴밀한 유대를 가질 수는 있었겠지만 ‘생물학적’ 부자지간은 되기 힘든 듯하다. 이어지는 아래 기록에서 유가 위기에 처하는데 평군진조의 반응은 보이지 않고 있으며, 도리어 유와 적대하게 되는 무열과 서로 마음에 없는 밀약을 맺은 정황까지 있는 것은 위에서 본 바와 같다.
특히 ‘대군(大君)’이 무열을 뜻한다면, 무열과 유의 ‘랩배틀(?)’에서 ‘한식(韓式) 담장’과 ‘왜식 문양(倭文織) 매듭’의 대비는 매우 흥미롭다. 무열과 유의 대화와 영원의 독백 등은 ‘이두’와 비슷한 고대 현지어 음차 표기로 되어 있어 <역주 일본서기>(2013)의 번역을 전적으로 따랐는데, 필자는 ‘유’가 쌓았다는 반도식 담장은 그의 출신과 반도의 영향력을 암시하고 무열의 허리춤에 있는 열도식 문양 매듭은 무열이 지금 어느 편에 서있는지를 말해준다고 해석한다. 또 이 이야기를 기록한 <일본서기> 편자의 의도는 반도와 열도를 의식적으로 ‘분리’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열이 ‘폭군’이기는 하지만 열도의 ‘독립’ 의지를 드러낸 인물임을 표현하려고 하지 않았을지.
유와 영원의 마음을 확인한 무열은 곧바로 쿠데타 준비에 착수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반면 유도 이 대화 직후 무열이 배신할 낌새를 눈치 채고 사마, 사아군, 그리고 오월 지역에서부터 오랫동안 동거동락한 ‘동지’ 대반금촌련(大伴金村連)의 협조를 구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특히 대반금촌련은 평군진조로부터 일정 정도의 군사권을 위임받은 것으로 설정되는데, 그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판세가 급변할 수 있는 상황에서 무열이 좀 더 빨리 움직이게 된다.
此夜速向大伴金村連宅。會兵計策。大伴連將數千兵。徼之於路。戮鮪臣於乃樂山。〈一本云。鮪宿影媛舍。卽夜戮。〉
(무열은) 이날 밤에 즉시 대반금촌련(大伴金村連: 오호토모노카나무라노무라지)의 집에 가서 군사를 모으고 계책을 세웠다. 대반련은 수천 명의 군사를 이끌고 길을 막고서 유신을 내락산(乃樂山: 나라야마)에서 죽였다[어떤 책에서는 유(鮪)는 영원의 집에 머물렀고, 그날 밤에 살해당했다고 적었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대반금촌련은 뜻밖에 유를 배신하여 무열의 손을 잡고 유 일행을 추격하는 선택을 한다. 필자는 무열이 대반금촌련의 집을 포위하고 그 가족을 인질삼아 그가 유, 사마, 사아군을 배신하는 선택을 할 수밖에 없게끔 강요한 것으로 설정했다. 반면 대부분의 군사력이 무열과 대반금촌련의 수중에 들어간 상황에서 유 일행의 선택은 ‘주위상계(走爲上計)’ 밖에는 없다. 추격을 당해 급박한 상황에서 유는 사마와 사아군의 퇴로를 확보하고 추격군을 유인하여 맞선다.
유가 ‘옥쇄’를 택한 배경에는 부인 영원이 무열에게 납치당하다시피 하여 억류되어 있는 상황도 있다. 영원의 아버지 물부추록화(物部麤鹿火: 이름에 가득한 ‘사슴’(鹿) 글자에 주목하여 인물의 세부 설정을 했다) 역시 무열의 편에서 목숨을 부지하고 침묵을 지키는 것 외에 선택의 여지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내락산 기슭에서 유는 대반금촌련의 군사들에 포위되고, 직접 대결을 원한 무열과 생애 마지막 혈투를 벌이게 된다. 유는 결국 죽고, 이 광경을 목도한 영원은 아버지의 죽음을 슬퍼하는 오필리어처럼 긴 애도의 시를 읊는다.
是時。影媛逐行戮處。見是戮已。驚惶失所。悲淚盈目。遂作歌曰。伊須能箇瀰。賦屢嗚須擬底。擧慕摩矩羅。施箇播志須擬。慕能娑幡爾。於褒野該須擬。播屢比能箇須我嗚須擬。逗摩御暮屢。嗚佐褒嗚須擬。柁摩該爾播。伊比佐倍母理。柁摩暮比爾。瀰逗佐倍母理。儺岐曾褒遲喩俱謀。柯㝵比謎阿婆例。於是影媛收埋旣畢。臨欲還家。悲鯁而言。苦哉。今日失我愛夫。卽便灑涕。愴矣纏心。歌曰。婀嗚爾與志。乃樂能婆娑摩爾。斯斯貳暮能。瀰逗矩陛御暮黎。瀰儺曾々矩。思寐能和俱吾嗚。阿娑理逗那偉能古。
이때 영원은 (유신이) 살해당하는 곳에 쫓아와 죽은 것을 보았다. 놀라고 두려워서 어찌할 바를 모르고, 슬픈 눈물이 눈에 가득하였다. 드디어 노래를 불렀다.
(영원): 포류(布留: 후쿠)를 지나, 고교(高橋: 타카하시)를 지나, 물건이 많은 저택을 지나, 춘일(春日: 카스가)을 지나, 소좌보(小左保: 워사호)를 지나, 아름다운 식기에는 밥을 담고 아름다운 주발에는 물을 담아 울면서 간다. 영원은, 아아.
영원이 시신을 장사지내고 집으로 돌아가려 할 때 슬픔에 잠겨 “괴롭구나, 오늘 나의 사랑하는 님을 잃었다.”라고 말하였다. 눈물을 흘리면서 괴로운 마음으로 노래를 불렀다.
(영원): 내락산 골짜기에 사슴이나 멧돼지같이 물에 잠겨 구석에 처박혀 있는 유신 서방님을 찾아내지 말아라. 멧돼지여.
- <일본서기>, 왜왕 무열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비극을 겪은 영원에게 무열은 반(半)강제적인 결혼을 종용하지만, 아버지 물부추록화까지 동원된 설득에도 영원은 끝까지 거절했을 듯하다. 후에 무열이 왜왕에 즉위할 때 왕비는 정작 다른 사람인 것에서 이를 짐작할 수 있다. 무열의 분노는 극에 달하지만 떠나는 영원을 결국 붙잡지 못하지 않았을까 한다. 필자는 영원이 사마와 사아군을 뒤따라 고향인 해남 지역 소국으로 귀국하여 잠시 머물다가 ‘오국’(吳國: <일본서기> 기록의 오국)으로 떠나는 것으로 설정했다. 그곳에는 오래전 영원보다 조금 덜 슬프지만 비슷한 운명을 겪고 떠나 큰 성공을 거둔 그의 ‘선배’가 있다.
한편 사마와 사아군은 유가 죽음으로 확보한 퇴로를 따라 사마의 출생지인 각라도를 거쳐 해남 지역 소국으로 돌아와 다시 은거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사아군을 왜왕에 옹립하려는 사마의 계획은 실패했고, 유와 대반금촌련이라는 실력자들을 잃었다. 반면 사마와 사아군까지 제거하려 했던 무열도 그들을 살려 보낸 꼴이니 매우 아쉬운 것은 마찬가지다. 왜국으로 간 후왕들의 자중지란에 쾌재를 부르다 사마의 귀국 소식을 들은 동성왕도 겉으로는 ‘다행’이라고 말하지만 그 표정은 일그러져 있다.
불씨를 남겨놓는 ‘성공한 쿠데타’
小泊瀨稚鷦鷯天皇。億計天皇太子也。母曰春日大娘皇后。億計天皇七年。立爲皇太子。長好刑理。法令分明。日晏坐朝幽枉必達。斷獄得情。又頻造諸惡。不脩一善。凡諸酷刑無不親覽。國內居人。咸皆震怖。
소박뢰치초료천황(왜왕 무열)은 억계천황(억계왕)의 태자다. 어머니는 춘일대랑(春日大娘) 황후라고 한다. 억계천황 7년에 황태자가 되었다. 장성하여서는 죄인을 다스리고 비리를 판정하는 것을 좋아하였다. 법령에도 밝아 해질 무렵까지 정사를 돌보고, 숨겨져 있는 억울한 죄는 반드시 통찰하여 밝혔으며 소송의 심리에 매우 능하였다. 또 자주 여러 나쁜 일을 하였고, 하나도 좋은 일을 하지 않았다. 무릇 모든 혹형을 몸소 주관하였다. 국내의 인민들이 모두 두려워하였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왜왕 무열은 법령에 밝고 소송과 판결에 능했다니 ‘좋은 일’에 쓰여야 할 능력이다. 다만 ‘숨겨져 있는 억울한 죄’를 통찰하고 밝히는 것은 좋은데, 문제는 죄인으로 지목된 누구에게나 공평했느냐다. 또 ‘좋은 일’이란 것을 하지 않고 잔혹한 형벌을 즐기는 성향은 백성들이 두려워할 만한 것이며, 성군(聖君)이라 말하기는 힘들다. <일본서기>는 대체로 다음 왜왕인 계체왕(繼体王)은 군자(君子)화하고 무열은 폭군화하는 방향으로 대비하여 묘사하고 있으므로(김상 2011) 정확한 평가는 어려우나, 좋은 군주라고 보기도 힘들지 않느냐는 것이 필자의 ‘인상 비평’이다. 위에서 보듯이 즉위전기에 자세히도 서술된 행적들과, 차마 여기에 옮기기 어려운 즉위 후의 악행들을 살펴보면 과장이나 가필을 감안해도 필자와 같은 설정이 합리적이지 않을까 한다.
冬十一月戊寅朔戊子。《十一》大伴金村連謂太子曰。眞鳥賊可擊。請討之。太子曰。天下將亂。非希世之雄。不能濟也。能安之者。其在連乎。卽與定謀。於是大伴大連率兵自將圍大臣宅。縱火燔之。所僞雲靡。眞鳥大臣、恨事不濟。知身難免。計窮望絶。廣指臨詛。遂被殺戮。及其子弟。... (중략)
十二月。大伴金村連平定賊訖。反政太子。... (중략) ... 於是太子命有司設壇場於泊瀨列城。陟天皇位。遂定都焉。是日。以大伴金村連爲大連。
(498년) 겨울 11월 무인삭 무자(11일)에 대반금촌련이 태자에게 “진조(眞鳥: 마토리)라는 놈을 쳐야 합니다. 청컨대 치게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였다. 태자가 “천하가 어지러워지려고 한다. 세상에 훌륭한 영웅이 아니면, 능히 이것을 안정시킬 수 있는 사람은 그대 대련일 것이다.”라고 말하였다. 그리고 즉시 같이 계책을 세웠다. 드디어 대반대련은 병력을 이끌고 스스로 대장이 되어 대신[진조]의 저택을 포위하고 불을 질러 태웠다. 진조대신(眞鳥大臣: 마토리노오호오미)은 일의 성취가 어렵게 된 것을 분하게 여기고, 피신하기 어려움을 깨달았다. 계획은 좌절되고 절망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널리 소금을 가리켜 저주하였다. 드디어 살해당하여 그 자제들에게까지 미쳤다... (중략)
12월에 대반금촌련은 적을 평정하고 정사를 태자에게 되돌렸다... (중략) ... 이에 태자는 유사(유사)에게 명하여 단장(壇場: 타카미쿠라)을 박뢰열성(泊瀨列城: 하츠세노나미키)에 설치하고 천황의 자리에 올랐다. 그리고 이 날 대반금촌련을 대련(大連: 오호무라지)으로 삼았다.
- <일본서기>, 왜왕 무열 즉위전기(卽位前紀) (번역 <역주 일본서기>)
위 기록은 무열이 왜국으로 온 498년 8월 후 시간이 지난 11~12월, 무열이 계획한 쿠데타가 완성되는 사건을 그리고 있다. 김상(2011)의 추정처럼 지원 병력(단, 무열 자신이 일군 ‘임나 네트워크’의 병력)이 이 때 도착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한편 대반금촌련은 무열의 편에 선 후로 평군진조 타도를 주도하고 무열을 왜왕위에 올리며 벼슬까지 올려 받고 있다. 그러나 필자가 앞에서 대반금촌련이 무열에게 자발적으로 협력하지 않았고 본심도 숨겼을 것이라고 설정한 이유가 있는데, 후에 계체왕의 즉위 부분에서 보게 될 것이다. 평군진조를 타도하는 것은 사마의 계획대로 사아군이 옹립되었더라도 어차피 이루어져야 했던 일이다.
다음 포스팅은 오월 지역으로 무대를 옮겨, 중국사에서 손꼽히는 남제(南齊)의 폭군 동혼후(東昏侯)의 혼란한 치세와 이에 휘말린 오월 지역 백제 캐릭터들의 행적에 대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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