南方創作/列傳

폭군의 시대 <3> - 희대의 폭군 동혼후(東昏侯)와 남제(南齊) 왕조의 황혼(黃昏)

이름없는 꿈 2017. 5. 19. 20:36

* 스토리 설정: ‘대륙백제’의 선택과 그 행적 (上)
498년 4월 남제의 개국공신인 대사마 겸 회계태수 왕경칙(王敬則)이 명제 소란(明帝 蕭鸞)에게 반기를 들자 그 군세가 삽시간에 1만에서 10만으로 불어나는 ‘기적’을 보였다는 것은 ‘동성왕 중기 (3)’ 포스팅에서 상술한 바 있다. 필자는 그 ‘배후’로 오월(吳越) 지역에 헤게모니를 구축하고 있었다고 생각하는 ‘대륙백제’를 설정했다.


‘대륙백제’의 위세는 본래 회남(淮南)과 오월 지역의 ‘다문화’ 해양 세력으로서 경제력을 갖춘 것에서 비롯되지만 정치적으로는 역시 ‘백제-북위 전쟁(488, 490)’의 독자적 승리와 ‘종리 공방전(495)’에서 남제 정권에 대한 기여가 크게 뒷받침하는 것으로 그려지고, 그 주축은 그 동안의 포스팅에서 누누이 강조했던 ‘4장군’과 회남 지역 ‘4태수’이다. 이들 중 필자가 부각시키는 인물은 ‘불중후 해례곤(弗中侯 解禮昆)’과 ‘벽중왕 찬수류(辟中王 贊首流)’이고 찬수류는 목간나(木干那)와 함께 작위 수여(495) 후 반도로 귀국하며, 이후 그에게 벌어지는 사태도 앞 포스팅들에서 설정한 바 있다. 


해례곤의 출자(出自)와 전공(戰功)에 대한 설정 역시 앞 포스팅들에서 이루어졌었는데 ‘대륙백제’ 육지 군사력의 핵심 인물이다. 그는 청년 시기 반도의 정치 투쟁(477)에서 죽을 고비를 넘긴 후 오월 지역으로 이주한 초기에 그 일대 상업 네트워크의 2인자로 성장하는 여인 ‘백선(苩仙: 가상 인물)’과 결혼하는 것으로 설정된다. 설정 상 백선은 백제 위사좌평 백가(苩加)의 동생으로, 본래 대대로 백제에 복속된 마한의 샤만 소국인 신소도국(臣蘇塗國)의 방위를 담당하고 천군(天君)을 배출하기도 했던 집안의 후손이다.


백가와 백선 남매는 어렸을 적에 그들의 아버지가 백제 좌현왕(左賢王) 곤지(昆支)의 도왜(渡倭) 원정군에 자원했다가 객지에서 전사했으며, 백가는 신소도국의 별장(別將)으로 성장하여 백제의 정치에 관여하게 되는 반면 상업과 해양에 관심이 많았던 백선은 오월 지역으로 일찍 이주하여 그의 대모(代母)나 다름없는 오월 상업세력의 1인자 ‘월지향(越枳香: 가상 인물)’을 스승으로 삼고 세력을 키워가게 된다. 월지향은 460년대에 오월 지역으로 이주하여 상업과 교역으로 성공한 여인으로 항상 눈 아래 얼굴을 비단천으로 둘러싸고 있으며 백제 출신이라는 것만 알려져 있을 뿐 이주 이전의 행적도 아는 이가 없다. (물론 그가 누구이며 어떤 사연을 가졌는지 극의 초반부에 이미 드러나게 되기는 한다.)


다시 498년의 상황으로 돌아오면, 쾌속진군하며 기세를 올리던 왕경칙의 반군은 단양(丹陽)에 수군(水軍) 진입이 실패하는 바람에 남제 조정의 관군과 교착 상태에 빠지고 설정 상 왕경칙은 명제 소란과 태자 소보권(蕭寶卷)을 제거하기 위한 암살단을 궁궐에 침투시킨다. 암살단 가운데는 해례곤과 백선 부부의 아들인 18세의 해강(解剛: 가상 인물)이라는 청년도 포함되어 있는데, 암살단은 간발의 차로 임무 완수에 실패하고 해강은 도주하다 큰 부상을 입고 행방불명되고 만다. 설상가상으로 백선도 마침 금융세력가들인 ‘은행(恩幸)’들을 포섭하기 위해 남제 수도 건강성에 머무르다가 관군에 체포된 상황이다.


며칠 지나지 않아 왕경칙이 전사하여 수장을 잃은 반군이 불리해졌지만, 반군의 규모를 두려워한 관군 측도 명제 소란이 곧 병사(病死)하는 바람에 진압을 시도하지 못하고 요구 조건을 내걸어 화의(和議)를 제안하는데, 반군의 지도부와 가담한 백성들의 죄를 묻지 않는 대신 이미 포로가 된 반군의 유력자들을 인질로 삼고 ‘대륙백제’는 앞으로 북위와의 전쟁에 무조건 협력한다는 조건이다. 협상 테이블에 앉은 월지향과 함께 반군의 지도부에 참여했던 해례곤은 아들이 행방불명되고 백선이 잡혀 있다는 것을 알지만 조건을 받아들이지 않을 수도 없어 눈물을 머금고 화의를 받아들이며, 백선은 다른 인질들과 함께 현재의 진강(전장, 鎭江) 서부의 금산사(金山寺)에 유폐된다. 뿔뿔이 흩어져 위기에 처한 해례곤 일가(一家)가 다시 모일 수 있을지는 극 종반부의 주요 포인트 중 하나이다.



‘종합판’ 폭군 동혼후 소보권(蕭寶卷)
498년 5월, 16세에 남제의 황제로 즉위한 소보권은 당시 왕실 예법의 ‘기본’이며 철칙인 선왕(先王) 명제 소란에 대한 3년 상(2년 3개월 상)을 대놓고 귀찮아하다가 시신을 곧바로 매장해버리고 대신들은 불안에 휩싸이니(<상선약수(上善若水)> 2015), 아마도 수년 전의 폭군 울림왕 소소업(鬱林王 蕭召業)의 같은 사례를 떠올렸기 때문일 것이다. 일찍이 명제 소란은 소보권을 보좌할 고명대신들을 선별해놓았는데 이들도 초기부터 서로 또는 소보권과 반목과 대립이 잦아지니 정사(政事)가 어지러워졌다고 전한다(<상선약수> 2015). 그 결과 대신과 장수들의 반란이 연례행사, 혹은 ‘분기(分期) 행사’처럼 되었는데 아래에 ‘정리’할 기회가 있을 것이다.


기록상 소보권의 기행(奇行)과 악행(惡行)은 ‘폭넓고’ 다양하여 ‘놀부’의 악행을 열거하듯이 ‘정리’할 수 있는데 다음과 같다(<상선약수> 2015).

 

- 고명대신들 사이의 모함대로 가리지 않고 숙청하기. 반란과 자중지란이 잦아지고 국내 혼란이 극심해지는 것이 당연했다.


- 밤낮을 가리지 않고 예고 없이 궁 밖으로 행차하기. 행차의 시각과 장소를 전혀 예측할 수 없었고, 누구든지 행차의 북소리에 도망가야 했는데 눈에 띄면 황제에게 직접 죽임을 당했다. 이런 기행은 백성들을 극히 불안하게 하고 생활을 피폐하게 하였으므로 그 폐해가 극심하였다.


- 화재를 빌미로 화려한 궁궐 전각 중건(重建). 재정 파탄은 당연한 결과이다.


- 금을 깎아 연꽃 모양을 만들어 땅에 붙이고 미녀 애첩 반비(潘妃)를 걷게 하기.


- 파탄 난 재정을 메운다는 핑계로 궁궐 내에 시장(市場)을 차리게 하고 직접 ‘장사놀이’하기. 황제가 강매하는데 터무니없이 비싼 값에 사지 않고 배겨낼 신하는 없다.


- 역시 재정 충당의 명분으로 기발한 명목의 세금 부과하기. 주세(酒稅)는 물론 모자 장식에도 세금을 부과했다고 전한다. 그 와중에 탐관오리들이 창궐하는 것도 다반사이고, 이렇게 걷힌 세금의 용도는 당연히 호화 궁궐 건설과 주색잡기이다.


- 애첩 반비의 아버지인 반보경(潘寶慶)의 전횡과 악행을 방조. 호가호위(狐假虎威) 역시 말기적 현상의 하나이다.


- 콤플렉스를 형성할 만한 사건에 대한 기록, 또는 ‘처음에는 잘 해보려고 했다’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기록, 이 모든 기행과 악행에 대해 잠깐이나마 부끄러움이나 깨달음, 반성의 빛을 보였다는 기록도 전혀 없다.



전쟁 중에도 연속되는 반란: 소연(蕭衍)과 소의(蕭懿) 형제의 선택
폭군 행각으로 일관하는 남제 황제 소보권은 3년이 조금 넘게 재위했는데 굵직한 반란만 다음과 같이 5건에 이르고 결국은 반란에 의해 생을 마감하게 되었다(<상선약수> 2015).


소요광(蕭遙光)의 난(499년 8월): 소보권을 겨냥한 ‘반란 시리즈’의 첫 테이프를 끊은 것은 고명대신 중 한 명인 소요광이다. 서로 견제하여 모함하기 시작한 고명대신들과 그들을 의심한 소보권의 숙청이 연속되고 그 칼끝이 자신을 겨누게 될 것임을 두려워한 것이다. 그러나 거병 4일 만에 대패하고 소요광은 살해당했으며, 소보권의 의심은 진압에 앞장선 고명대신들에까지 미쳐 그들도 목숨을 잃었다.


진현달(陳顯達)의 난(499년 11월): 왕경칙과 같은 반열의 마지막 남은 개국공신인 진현달에게도 소보권의 숙청 위험 신호가 감지되었고 역시 반란을 일으켰다. 그러나 한 달 만에 전세가 밀리기 시작했고 진현달도 전사하여 무위로 끝났다.


배숙업(裵叔業)의 북위 투항(500년 1월): 북위와 ‘동부전선’을 맞댄 최전방의 예주자사(豫州刺史) 배숙업이 진현달의 난 직후 후방인 남연주자사(南兗州刺史)로 이임하라는 칙명을 받자 숙청의 전조로 여기고 주둔지인 수양(壽陽)을 들어 북위에 항복하니 이것도 그 자체로 반란 사태라고 봐도 무방하다.


최혜경(崔慧景)의 난(500년 3월): 배숙업의 투항으로 수양이 북위 영토가 되자 ‘동부전선’을 담당하던 소의와 최혜경 등이 수양을 회복하려 공격하고 선무제 원각(宣武帝 元恪)이 새로 즉위한 북위는 지원군을 보내 방어하려 하니 양국의 전쟁이 재개되었다. 수양 수복이 실패하여 남제군이 불리한 상황에 처했을 즈음 최혜경이 소보권의 동생 강하왕 소보현(江夏王 蕭寶玄) 및 최공조(崔恭祖)와 함께 광릉(廣陵)을 기반으로 반란을 일으킨다. 이전의 반란들과는 달리 최혜경의 반군은 건강성을 포위하고 성공을 눈앞에 두었으나, 내분이 일어나 동년 4월 최공조 등이 소의의 진압군에 합류하는 바람에 참패하고 최혜경은 참수 당했다. 이러한 반란의 잇단 실패는 소보권에게 그릇된 자신감을 심어주고 방종 욕구를 강화시켰다.


소연의 난(500년 11월): 최혜경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상서령에 제수되고 건강성을 지키며 명장이자 충신 반열에 오른 소의도 황제 소보권의 의심을 피해가지 못했다. 여법진(茹法珍) 등의 모함을 받은 소의는 500년 10월 결국 소보권이 내린 사약을 받게 되었다. 이렇듯 남제의 내분이 심화되는 동안 북위군은 회남(淮南) 일대의 많은 거점을 점령하게 되었다. 조정에 대한 충성심이 남달랐던 소의는 죽기 전 북위와의 ‘서부전선’을 지키던 동생인 옹주자사(雍州刺史) 소연이 거병할 것을 예언하였는데, 과연 소보권의 즉위 직후부터 주도면밀한 준비를 해오던 소연은 동년 11월 드디어 군사를 일으켰다. 이번에는 성공할 수 있을까. 소연의 난의 자세한 전개는 501년 반도와 대륙에 닥친 내전을 그리는 다음 포스팅들에 상술하도록 하겠다.



* 스토리 설정: ‘대륙백제’의 선택과 그 행적 (下)
소보권의 재위 초반 백선은 진강 금산사에 유폐되어 있었으나, 예전 그가 도와준 인연이 있는 반비(潘妃)와 반보경(潘寶慶) 부녀가 이 사찰에 불공을 드리러 왔다가 그와 마주치고, 반비 부녀가 ‘힘을 쓰게’ 하여 유폐가 풀리자 그는 성 밖에 나가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건강성의 백제 사신관인 집아관(集雅館)에 머물게 된다. 그가 북위와의 ‘동부 전선’에 있는 해례곤이나 주산군도에 있는 월지향에게로 돌아가지 않고 건강성에 머물게 된 데에는 사라진 아들 해강을 찾을 목적도 있다. 그러나 그는 백방으로 아들을 찾아다니다가 소보권의 폭정을 연속하여 목도하고 휘말리기도 한다.


한편 불중후 해례곤의 ‘외인부대’ 백제군은 남제 온 나라의 신망을 잃어가는 소보권에게 충성을 다하는 융통성 부족한 성격인 소의의 강권으로, 북위와의 동부 전선에 투입되어 많은 피해를 입을 뿐만 아니라 최혜경의 난 와중에 광릉태수 양무(楊茂)가 반군 편에 서는 분열상까지 나타나는 등 어려움을 겪는다. 특히 소의가 상서령에 제수된 후 모함을 받아 사약을 받고 죽자 해례곤과 사법명은 전쟁과 반란에 대한 불개입을 선언하고 백제군을 철수시키지만, 소연의 거병 소식을 듣고 고민에 빠진다.